Posted on 2009.06.02 11:07
Filed Under 역사 이야기


최근 MBC 특별기획으로 방영되고 있는 드라마 '선덕여왕'이 20% 이상의 시청률을 기록하며 월화극의 새로운 지존으로 떠올랐다. 당초 고현정의 TV 드라마 컴백 작품으로 , 이요원,고현정,엄태웅,박예진 등의 화려한 캐스팅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 일으켰으며 드디어 드라마 시작과 동시에 대박 드라마의 조짐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또한 최근 새롭게 불고 있는 여성중심의 드라마가 이제 사극의 범위에 까지 그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고 있다.(천추태후 등..)
국사에 조금의 관심이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아는 애기지만 우리나라 역사속에는 총 3명의 여왕이 등장한다.모두 신라의 여왕들이다.선덕여왕,진덕여왕,진성여왕.....
그리고 이웃 중국과 일본도 여왕의 수는 그렇게 많지 않은 편이다.
동양에서의 남성 우월주의는 유교가 본격적인 치세의 이념을 자리잡기 시작한 때 였으며 이런 사상으로 인해 동양에서는 여왕이 만들어지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그런 상황에 유독 신라에서만 3명의 여왕이 만들어진 이유는 신라사람들이 남녀차별에 비교적 자유로왔으며 유교적 사고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여왕(女王)은 성별이 여자인 군주를 가리키는 말이다. 제국의 여자 군주는 여천황(女天皇) 또는 여황제(女皇帝)라고 부른다. 영어 'Queen'은 여왕을 가리키는 낱말이지만 또한 왕비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앞서 말했듯이 우리나라에는 신라에서만 3명의 여왕이 있다.

선덕여왕(善德女王, ?~647년, 재위: 632년~647년)은 신라의 제27대 여왕이다. 성은 김(金), 휘는 덕만(德曼)이다. 진평왕과 마야부인(摩耶夫人)의 장녀이며 태종무열왕과 의자왕의 큰이모이다. 진평왕이 아들이 없이 죽자 화백회의에서 그녀를 신라의 새 왕으로 추대하여 성조황고(聖祖皇姑)라는 호를 올렸다. 연호를 인평(仁平)이라 하였다.
즉위한 해인 632년에 관원들을 전국 곳곳에 파견하여 백성들을 진휼(賑恤)하게 하고, 633년에는 조세를 면제해주는 등 일련의 시책으로 혼란스러웠던 민심을 수습하였다.
고구려와 백제의 신라에 대한 침공이 빈번히 발생하기 시작해 나라의 존립이 위협을 받는 상황이 발생하자, 이를 막는 한편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동맹을 맺어 외교적 방어선을 구축하는 공격적인 외교술을 펼쳤다.
더불어 민생의 안정에 주력하여 가난한 이들을 보살피도록 하는 구휼정책을 활발히 추진하였으며, 첨성대를 건립하여 농사에 도움이 되게 하였다. 그녀가 백성들을 얼마나 인자하게 아끼고 사랑했는지는 지귀(志鬼)의 설화에서도 알 수 있다. 당시 선덕여왕을 흠모하는 백성들이 많았는데 지귀는 그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선덕여왕이 영묘사를 행차할 때 그녀를 만나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가 깜빡 잠이 들었는데, 선덕여왕이 이를 보고 그의 가슴 위에 자신의 팔찌를 놓고 떠났다. 지귀가 잠이 깨어 이를 알고는 마음에서 불이 나 영묘사(靈廟寺)를 건립하였다고 한다.
또한 불교 또한 널리 장려하여 분황사, 영묘사 등 절을 많이 건립하고 불경을 연구시켜 불교의 일대 부흥을 가져왔다. 특히 선덕여왕은 웅대한 호국의 의지가 담긴 거대한 황룡사 9층 목탑을 세웠다. 황룡사 9층 목탑은 높이 80m의 거대한 탑으로 이를 모두 9층으로 한 뜻은 이웃의 9적을 물리쳐서 복속시키기 위해 나라 이름을 새겨넣은 것이다.
647년 상대등 비담(毗曇) 등 진골 귀족들이 여왕이 정치를 잘못한다는 구실로 반란을 일으키자 김춘추와 김유신으로 하여금 진압하게 하였다. 반란이 진압된 이후 얼마 안되어 승하하였다.
선덕여왕은 평소에 자신을 도리천, 곧 낭산 남쪽에 장사지내라고 하였는데 훗날 왕릉 아래에 사천왕사가 세워지게 되었다. 불교에서는 인간 세상의 한가운데에 수미산이 있고 그 위에 6천이 있는데 중턱에는 사천왕천, 꼭대기에는 도리천이 있다고 한다. 신라가 곧 불국토라는 관념에 비추어보면 선덕여왕은 승하 후 도리천에 승천하여 곧 신과 같은 존재가 된 것이다.
한때 남편이 없는 독신자라는 설이 확산되었으나 근거는 없다. 기록에 의하면 선덕여왕은 신라의 규례에 따라 세명의 남편을 뒀다. 그러나 후사를 얻는 데는 실패하였다.

진덕여왕(眞德女王, ?~654년, 재위: 647년~654년)은 신라의 제28대 여왕이다. 성은 김(金), 휘는 승만(勝曼)이다. 진평왕의 동생인 국반갈문왕(國飯葛文王)과 월명부인(月明夫人)의 딸이다.
자태가 풍만하고 아름다웠으며 키는 7척이었고 팔이 무척 길어 쭉 뻗으면 무릎까지 닿았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신체적 특징은 부처의 모습을 갖춘 보살에 비유되었을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647년 사촌언니인 선덕여왕이 비담의 난을 토벌하던 도중에 서거하자 왕위를 계승하여 즉위하였다. 연호를 태화(太和)라 하였다.
진덕여왕은 김춘추와 김유신의 보좌에 힘입어 즉위한 지 9일 만에 비담의 난을 종식시켰다. 비담을 비롯한 반란군은 김유신의 뛰어난 전술에 밀려 결국 궤멸되었다. 반란군을 토벌한 진덕여왕은 알천을 상대등에 임명하고 대아찬 수승을 우두주(牛頭州)의 영주로 임명하는 등 왕권 강화를 통한 정치적 정치적 개혁을 실시함과 동시에 국내 안정을 꾀하여 비교적 안정된 위치에서 정무를 집행하였다.
그러나 백제가 신라가 내분으로 내정이 불안한 틈을 타 그해 음력 10월 신라를 침공하였다. 이에 진덕여왕은 김유신을 출전시켜 백제군에 대적하도록 하였다. 이렇듯 백제의 지속적인 공략에 밀려 고전을 면치 못하던 신라는 설상가상으로 고구려까지 신라 공격에 가세하자 진퇴양난의 신세가 되었다. 그래서 648년에 고구려와 백제를 견제하기 위해 필요한 군사 지원을 얻기 위해 김춘추를 당나라에 사신으로 파견하였다. 당나라 역시 고구려 정벌을 위해서는 신라의 협조가 절실하게 필요했기 때문에 이를 환영하였다. 진덕여왕과 당 태종은 서로 간에 친교를 돈독히 한 다음, 나당 연합을 체결하였다.
진덕여왕은 그 후 김유신으로 하여금 국방력을 증강시켜서 훗날 삼국 통일의 기틀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진성여왕(眞聖女王, ?~897년)은 신라의 제51대 여왕(재위 887년~897년)이다. 성은 김, 휘는 만(曼) 또는 원(垣)이다. 경문왕과 문의왕후 김씨의 딸이자 헌강왕과 정강왕의 여동생이다.
진성여왕은 경문왕과 문의왕후의 소생이다. 정강왕이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서거하자 정강왕의 유언에 따라 887년 음력 7월에 왕위를 이어받아 즉위하였다. 소행이 좋지 못하고 음란하기 그지없었던 진성여왕은 색욕에 빠져 수많은 미소년들을 징집하여 처소로 불러들인 뒤 음사를 즐기는 데에만 주력하여 나랏일을 제대로 돌보려 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여왕과 관계를 맺은 정부들과 여왕에게 아첨하는 간신들의 무리가 나라의 권력을 장악하여 상벌이 함부로 행해지고, 뇌물이 난무하고, 관직을 매수하는 등 조정의 기강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렇듯 왕실과 조정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자 자연스레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해가는 데다가 여왕의 심한 낭비로 국고가 텅텅 비어 각 지방의 호족들을 닦달하여 세금 납세를 독촉하였다. 그러자 민심은 점차 흉흉해져 여기저기서 민란과 도적이 숱하게 일어나게 되었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지방의 호족들은 각자 독자적 세력을 키우는 데 전념하였다. 조정에서는 그들을 도적이라고 부르며 군대를 파견해 진압을 하려 했으나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 그 뒤로 조정의 힘은 겨우 수도인 서라벌 주변에 한정될 정도로 급격히 쇠락해갔으며, 지방 호족들은 서로 간에 힘겨루기 양상을 보였다. 치열한 싸움 끝에 살아남은 견훤과 궁예가 각자 나라를 세우자 후삼국 시대의 서막이 열렸다.
이렇듯 나라가 분열해가자 894년 진성여왕은 최치원을 아찬으로 임명하여 그의 조언에 따라 조정을 일신하고자 안간힘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던 도중 894년 음력 6월, 병마에 시달리던 진성여왕은 헌강왕의 손자인 요를 왕태자로 삼아 왕위를 물려주었다. 그러고는 그해 음력 12월에 승하하였다.

중국의 여황제
중국 역사상 여황제는 딱 한명만이 존재한다.
측천무후(則天武后, 624년: 무덕(武德) 7년 1월 23일 ~ 705년: 장안(長安) 5년 11월 2일)는 당나라 고종 이치의 황후이며 중국 역사상 최초이자 유일무이한 여황제이다. 중국에서는 그녀를 무측천(중국어: 武則天)이라 부르기도 한다. 음탕하고 간악한 요녀(妖女)라는 비난과 나라를 훌륭히 다스린 명군이라는 칭송을 같이 받고 있다. 이름은 조(照)이고, 아명은 미랑(媚娘)이다. 황제로 즉위하자 자신의 이름을 조(曌)로 바꾸었다.

일본의 여왕들
일본의 비교적 여황제가 많은 편이다.

스이코 천황(여천황)
고교쿠 천황(여천황)
지토 천황(여천황)
겐메이 천황(여천황)
겐쇼 천황(여천황)
고켄 천황(여천황)
메이쇼 천황(여천황)
고사쿠라마치 천황(여천황)  역사상 이렇게 총 8명의 여왕이 존해한다. 물론 이 중에는 가상의 인물도 존재한다는 논란이 오늘날 까지 진행되고 있다. 일본에 이렇게 여왕이 많았던 이유는 일본에서는 천황을 신으로 여겼기 때문에 그 성별에 크게 구애를 받지 않았다. 즉 일본의 신앙에서 신은 남신과 여신으로 되어 있으며 천황도 따라서 남자와 여자가 구분없이 인정될 수 있는 사회 분위기 였다는 것이다.

유럽의 여왕들

 <영국>
잉글랜드의 메리 1세(재위 1553년~1558년)
엘리자베스 1세(재위 1558년~1603년)
잉글랜드의 메리 2세(재위 1689년~1694년)
앤여왕(재위 1694년~1702년)
빅토리아 여왕(재위 1837년~1901년)
엘리자베스 2세(재위 1956년~현재)

 <네덜란드>
빌헬미나 여왕(재위 1890년~1948년)
율리아나 여왕(재위 1948년~1980년)
베아트릭스 여왕(재위 1980년~현재)

 <에스파냐>
이사벨 1세(재위 1474년~1504년)
이사벨 2세(재위 1833년~1868년)

 <포르투갈>
마리아 1세(재위 1777년~1816년)
마리아 2세(재위 1826년~1853년)

 <러시아>
예카테리나 1세(재위 1725년~1727년)
안나 1세(재위 1730년~1740년)
옐리자베타 1세(재위 1741년~1762년)
예카테리나 2세(재위 1762년~1796년

 <폴란드>
야드비가여왕(재위 1382년~1399년)
안나여왕(재위 1574년~1586년)

 <덴마크>
마르그레테 1세(재위 1387년~1412년)
마르그레테 2세(재위 1972년~현재)

 <스웨덴>
크리스티나 여왕(재위 1632년~1654년)
울리카 엘레오노라여왕(재위 1718년~1719년)

 <오스트리아>
마리아 테레지아 1세(재위 1740년~1780년)



 

Posted on 2008.07.25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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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백리의 표상 ."
"세종같은 임금에 황희같은 정승."

조선 세종때에 18년 동안 영의정의 자리에 있으면서 세종대왕의 찬란한 태평성대를 이끌었던 황희에 대한 대표적 표현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머리속에서 황희는 관직자의 표본,청렴결백한 관리,뛰어난 정치가로 각인되어져 있다. 요즘 KBS 의 [대왕세종] 에서 개성있는 배우 김갑수씨가 황희역으로 열연을 하고 있다.
황희는 워낙 생활이 근검해서 정승의 위치에 있었지만 초가집에서 살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물론 과장이 있겠지만 그만큼 사람들은 황희의 청렴함을 늘 높이 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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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왕세종 황희역 배우 김갑수씨>


그런데 이런 황희정승에 대해 세종실록에 갖가지 비리 스캔들이 무수히 열거되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조선시대 관리의 감찰을 맡았던 사간원과 사헌부에서 황희의 비리에 대한 고발과 탄핵이 수차례 였으며
세종대왕도 이를 무시하지 못해 황희를 수차례 좌천시킨다. 물론 바로 복직 시키고 더 높은 관직에 기용하기는 했지만...

우리가 아는 황희정승과 당시 사관들이 기록한 황희정승의 모습은 어떻게 다를까?

새로운 왕조의 신하

황희는 고려말 개성에서 태어났다.
열네살 되던해 음서로 복안궁녹사가 되었다가 스물한살 때 과거에 합격하여 성균관 학관이 되었다.
고려가 망하고 이성계가가 조선을 건국하자 다른 고려 유신들과 같이 두문동으로 들어갔으나 이성계의 간곡한
청으로 두문동을 나와 벼슬길에 올라 두문동 사건 을 피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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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의 두문동비>


음서 [蔭敍]  : 고려·조선 시대 부(父)나 조부(祖父)가 관직생활을 했거나 국가에 공훈을 세웠을 경우에 그 자손을 과거에 의하지 않고 특별히 서용하는 제도.

<두문동사건>
이성계(李成桂)의 조선건국(朝鮮建國)에 반대한 고려의 유신 신규(申珪) 등 72인은 개성 남동쪽에 있는 이른바 ‘부조현(不朝峴)’에 조복(朝服)을 벗어 던지고, 두문동에 들어가 끝까지 신왕조(新王朝)에 출사(出仕)하지 않았다. 이에 이성계는 두문동을 포위하고 72명의 고려 충신들을 몰살하였는데, 후일 정조(正祖)때, 표절사(表節祠)를 그 자리에 세워 그들의 충절(忠節)을 기렸다.                                  
  - 네이버 백과사전 -



그 후 정종과 태종을 거쳐 세종대에 이르러 좌참찬에 올랐고 예조판서,이조판서,우의정을 거쳐 마침내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는 영의정에 올랐다.1449년 벼슬에서 물러날 때 까지 18년간 영의정에 재임하면서 세종을 도와 농사의 개량 , 예법의 개정, 천첩(賤妾) 소생의 천역(賤役) 면제 등 업적을 남겼다.
황희와 세종은 그 시작이 그리 좋지는 않았다.
1418년 태종이 세자인 양녕대군을 폐하고 충녕대군을 세자로 책봉되자 이를 반대하여 서인으로 좌천되고 교하(交河)로 유배, 다시 남원에 이배되었다.
하지만 세종은 임금에 오른 뒤 당시 조정신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를 관직에 다시 기용했으며 이후 몇 몇번의 좌천과 유배를 당하지만 87세에 벼슬에서 물러나기 까지 세종의 곁에서 세종의 정치를 도왔다.

청백리를 상징하는 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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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희 정승의 영정>

황희정승의 청백리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일화가 바우쇠일화와 겨울관복 일화이다.
하루는 세종이 궁중에서 연회를 베풀었는데 영남 우미골의 광대 바우쇠가 공중 줄타기 묘기를 보이며 허리에 맨 비단천을 양쪽 엉덩이에 번갈아 가져다 대며 "이게 바로 황희정승댁 속곳춤이라 ..."라고 말을 해 좌중을 웃겼다.
연회가 끝나고 세종이 이를 궁금히 여겨 불러다 물어보니 대답왈
"황희정승댁은 가난하여 속곳하나를 가지고 하루는 마님이 있고 하루는 아가씨가 입고 외출을 한다더라."라고 말했다.
황희정승의 겨울관복 일화도 유명하다.
황희정승은 겨울관복이 한벌 밖에 없었는데 겨울 어느날 정무를 일찍 마쳐 집에 오는 길로 그 관복을 뜯어 빨래를 했다.화롯가에 말리면 다음날 입궁할 때 까지는 입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밤중에 궁궐로 부터 즉시 입궁하라는 어명이 내려졌다. 이에 어쩔수 없이  풀어놓았던 솜들을 몸에 두르고 그 위에 관복 겉저고릴 덧입고 왕앞에 나가게 되었다. 세종과 침입한 왜구에 대해 논의를 하던중 세종은 관복사이에 삐져나온 솜뭉치를 보고 이를 의아하게 생각해 물으니 황희정승이 자초지정을 애기하게 되었고 이에 감복한 세종은 황희에게 비단 열필을 하사하려고 하였으나 굶주리고 있는 백성을 생각한 황희의 사양에 비단하사를 포기했다는 일화이다.
두 이야기 다 당시 최고의 위치에 있던 영의정 황희가 얼마나 검소하게 살았는지를 나타내 주는 일화이다.

실록속의 황희

조선왕조는 기록의 왕조이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도 등재되어 있는 조선왕조실록은 당대의 왕까지도 그 기록의 열람이 제한되었던 엄격한 기록이다.
여기에 황희에 대한 비리스캔들이야기가 나온다.

"관가의 둔전을 의정 황희의 어머니 김씨에게 주었으니 이는 반드시 내막이 있다."
                                                                     - 세종실록 13년 사헌부 보고문 중 -
"황희가 교하 수령 박도에게 토지를 요구하고 아들을 행수로 들이 붙였으며 또한 태석균의 고신(고문)을 청탁으로 막아 주었으니 이는 진실로 의롭지 못하다"
                                                                     - 세종실록 13년 9월8일 세종의 어록 -



태석균 사건은 황희가 투옥된 태석균의 감형을 사사로이 사헌부에 부탁한 일로 황희는 이일로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었다.
이 사건 뿐만 아니라 황희는 첨절제사 박유에게 뇌물을 받았다가 구설에 오르기도 했으며 박용이라는 역리에게 말 여러필을 선물 받고 청탁성 편지를 썼다가 의금부에 하옥되기도 한다.
황희의 사위가 저지른 살인 사건에 대해서도 당시 좌의정이었던 맹사성과 형조판서 서선이 공모하여 범죄를 축소하고 무마하려다가 발각되어 관직에서 물러나기도 하였다.이 이외에도 여러차례 비리연루로 사헌부와 사간원 탄핵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영의정 월급은 얼마 ?

조선시대 최고의 관직인 영의정의 연봉은 쌀과 잡곡을 합해 쌀 90석 명주 5필 삼베 15필이었다.
그러나 이마저도 다 받지 못하는 때가 허다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관리들은 생계를 위해 비리를 저지르기도 하고
고위직으로 갈수록 챙겨야 할 식구들이 많아져 정치자금을 받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렇듯 뇌물을 받는 관리들이 만연하지 조정에서는 이를 방지하기 위한 정책으로 청백리포상이었던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뇌물을 받는 관리들이 너무 많아서 청백리상을 만든 것이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황희 , 맹사성 , 조광조  등등이 이 청백리 포상을 받았다. 따지고 보면 우리가 알고 있는 왠만한 위인이면 누구나 이 청백리 포상을 받았다. 그래서 가문의 족보나 연혁에 나오는 청백리포상은 그리 크게자랑할 만한 일이 아닐 수도 있다.

공적이 비리를 덮는다.

황희에게 이러한 많은 흠이 있었음에도 세종의 곁에서 18년간 영의정을 지내며 권력의 핵심에 있을 수 있었을까?
1392년 객구한 조선은 아직 그 기틀을 다 확립하지 못한 상태 였고 또한 두번의 형제들의 싸움으로 만들어진 왕권이 이제 세종에게 넘어가는 시점에 세종은 도덕적으로 청렴한 신하보다 정치력이 뛰어나고 자신의 이념을 실현해 줄 수있는 신하가 필요했을 것이다.
실제로 황희는 세종과 함께 정무를 보던 시절 세종의 의중을 가장 잘 이해하고 이를 정무에 반영했으며 세종이 하고자하는 정책을 집행함에 있어 주저함이 없었다. 또한 영의정 황희 - 좌의정 맹사성의 조합은 세종의 정책을 가장 잘 실현시킬 수 있는 최강의 원-투 펀치였던 것이다.
이러한 이유가 황희의 수차례 비리연루에도 불구하고 세종이 그를 가까이 두고 정책을 논의한 배경이다.
수차례의 파직과 복권을 거쳐 마침내 영의정에 오른 황희는 자신을 믿고 끝까지 신뢰를 보내준 세종의 대업을 이루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게 된다.

황희에 대한 악평과 비리연루 의혹을 기록했던 사관들도 훗날에 이르러 서는 다음과 같은 평을 남긴다.
"성품이 지나치게 관대해 단점이 있으나 일처리함에 있어 생각이 깊고 식견과 도량이 넓어 재상으로서의
풍부한 자질을 지니고 있었다. 집을 다스리는 데에는 검소하고 기쁨과 노여움을 안색에 나타내지 않고
번거롭게 변경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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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파주시 문산읍 사목리. 경기문화재자료 제12호. 황희(黃喜:1363∼1452)가 1449년(세종 31) 87세의 나이로 18년간 재임하던 영의정을 사임하고 관직에서 물러난 후 갈매기를 벗삼아 여생을 보낸 곳이다.>




Posted on 2008.07.24 14:15
Filed Under 역사 이야기

종영을 1회 남기고 있는 SBS 드라마 일지매는 스토리가 이제 대미의 결말로 치닫고 있다.
19회 마지막 장면에서는 일지매인 겸이의 아버지를 죽인 원수인 인조와 일지매가 얼굴을 마주하는 장면으로 엔딩 되면서 마지막회의 내용을 더욱더 궁금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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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의 역활에 김창완이 캐스팅 되었을 때 더군다나 그 역활이 악역이란 것이 알려지면서 사람들은 그 동안 선한 이미지만을 보여주던 (물론 MBC 하얀거탑의 시니컬한 악역도 있었지만) 김창완이 과연 어떤 연기를 보여줄지 궁금해 하면서 한편 걱정을 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김창완은 자신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악역인 인조의 역활을 너무나도 잘 소화해 내었다. 만사가 귀찮은 듯한 눈 빛 , 주위사람들을 벌벌 떨게 만드는 잔인함 , 그러면서도 정작 본인은 아무일도 아니라는 듯한 말투로 극 중 악역을 훌륭하게 소화해 냈다는 게 사람들의 평이다.

극중에서 김창환이 연기한 , 일지매 겸이의 친아버지인 이원호의 형으로 인조반정을 통해 임금이 된 인조는 어떤 임금이었을까?

왕이 되기 까지

인조는 선조의 손자이다. 어렸을 때 능양군에 봉해졌고 선조의 뒤를 이어 임금이 된 광해군 때인  1623년 서인들의 지지를 얻어 반정으로 임금이 되었다. 반정당시 임금이었던 광해군은 임진왜란 당시 아버지 선조를 대신하여 여러 공을 세웠으나 전쟁이 끝나자 선조가 영창대군을 세자로 다시 책봉하려 하였다. 하지만 선조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자 북학파의 도움을 받아 왕위에 올랐다. 광해군은 왕위에 오른 뒤 당시 기울어 가던 명왕조와 새롭게 부상하는 후금왕조 사이에서 중립외교를 펼쳐 실리를 얻고자 하였으나 이것이 서인들에게 빌미를 주어 결국 반정이 일어나게 되었으며 인조가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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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반정으로 임금이 된 사람은 2명이 있었다. 연산군을 몰아내고 임금이 된 중종과 광해군을 폐위하고 임금이 된 인조. 하지만 이 두반정은 성격이 너무 다르다. 중종반정은 연산군의 폐륜과 실정이 주요 원인 이었다면 인조반정은 다분히 정치적인 쿠테타였기 때문이다.광해군때의 서인들은 명나라를 숭상하여 광해군의 중립외교에 반대했고 이 때문에 결국 광해군을 폐하고 인조를 등극 시킨 것이다.

두번의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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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 당시 청나라 병사>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의 치세는 그리 순탄하지 만은 않았다. 즉위 1년만에 반정공신 중 하나인 이괄이 난을 일으켜 한성을 버리고 공주까지 피신하였으며 광해군때의 중립외교를 버리고 반금친명 정책을 쓰다 1627년 후금의 침입을 받아 패배하고 형제의 의를 맺게 되는 이것이 정묘호란이다. 정묘호란 이후에도 계속 친명정책을 추진하다 1636년 국호를 청으로 바꾼 청나라 태종이 10만 대군으로 침입하여 마침내 남한산성에 항전하다 항복하여 군신의 의를 맺게 된다. 이 때 청나라 청태종에게 무릎을 꿇고 청나라 왕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번 고개를 숙이는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예를 갖추고 항복하게 되는 데 이것이 삼전도의 굴욕이다. 이 삼전도의 항복을 기념하기 위해 청나라의 요구로 세워진 삼전도의 비가 지금도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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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파구 석촌동에 있는 삼전도비>



아들을 죽인 임금

병자호란 후 청에 볼모로 잡혀있던 소현세자가 1645년 귀국하고 한달여만에 병을 얻어 급사를 하였다.
이를 두고 청왕조에서 인조를 폐하고 소현세자를 조선의 왕에 봉하려 한다고 의심한 인조가 아들 소현세자를 독살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인조실록에는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세자는 환국한지 얼마 안되 병을 얻었고  병을 얻은지 며칠 안되 사망하였다. 시체는 온몸이 새까맣고 뱃속에는 피가 쏟아져 나왔다.검은천으로 죽은 세자의 얼굴 반을 덮었는데 옆에서 모시던 사람들도 얼굴을 알아보지 못했다.낯빛은 중독된 사람과 같았는데 외부의 어느 누구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실록의 내용만으로도 독살을 의심하기에 충분하다.
소현세자의 죽음 뒤의 정황은 더욱더 인조를 의심하게 만든다. 인조는 소현세자의 부인인 강빈을 소현세자가 죽은 뒤 1년 후에 사사 시켰으며 소현세자의 뒤를 이어 응당 세자로 책봉되어야 할 소현세자의 자식 대신에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하게 된다. 또한 통상적으로 왕가의 식구들이 병사하게 되면 담당 의관이 처벌을 받는것이 관례였으나 소현세자를 치료하던 의관 이형익은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았다.
이렇듯 인조의 아들 소현세자의 죽음은 아직도 역사의 미스테리로 남겨져 있다.

인조는 폭군 ?

일지매 드라마에서 비치는 인조의 모습은 백성을 돌보지 않고 아들마저 죽이는 잔인한 임금으로 묘사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모습들이 인조의 모든 면일까?
인조가 요즘 세상으로 치면 쿠테타로 왕이 되었으며 재위시 두번의 전쟁을 통해 조선 백성을 크나큰 곤경에 빠뜨리게 한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또한 당시의 국제정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무작정 숭명정책을 펼치다 백성들의 고통을 불러 온 것 또한 사실이다.하지만 이러한 사실로 인조를 무작정 폭군이었다고 매도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듯 하다.
숱한 난리를 겪으면서도 인조는 군제를 개편하여 총융청과 수어청을 신설하였으며 북방의 방위를 위해 곳곳에 진을 설치하기도 하였다.전란으로 피폐해진 농가를 살리기 위해 대대적인 토지조사를 실시해 세금제도를 합리화 하였다. 또한 이이,이원익의 주장을 받아들여 나라에 진상하던 특산물을 쌀로 대치하여 받게 하는 대동법을 실시 하였으며 송시열,송준길,김집,김육 등의 대학자, 대정치가가 배출되는데 밑바탕을 만들었다.
인조는 자신의 의지 보다는 당시 서인들의 추대에 의해 임금이 되었다. 임금이 된 이후에도 자신을 임금으로 만들어준 공신들을 무시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그래서 더더욱 나약한 임금으로 보여졌을 것이다.그렇게 본다면 인조역시 조선시대의 또 한명의 불행한 왕이 아니었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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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파주에 있는 인조대왕능 장릉>




Posted on 2008.06.13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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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 13일 (금)

1917년 =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현 연세대 의대) 개교
1918년 = 광화문 전차 운행 개시
1938년 = 일제, 학교근로보국대 계획 발표하고 경세정제대 강당에서 육군지원병훈련소 입소식 개최
1955년 = 북한과 일본, 어업협정 조인
1956년 = 영국군, 74년만에 수에즈 운하에서 완전 철수
1958년 = 일본, 약탈해간 한국문화재중 반환할 문화재 목록 정부에 전달.
1961년 = 국제연합 한국통일부흥위원회(UNCURK), 5.16 군사쿠데타로 마비된 한국 의회제도 부활 촉구
1967년 = 서울에서 부정선거 규탄하는 대규모 학생시위 발생, 11개 대학 임시휴교
1971년 = 뉴욕타임스, 미국의 베트남전 개입에 관한 국방부 비밀문서 폭로, 미국내 반전여론 고조
1973년 = 미국.월맹.월남.베트콩, 파리에서 베트남전 휴전 앞당기기 위한 협정에 서명
1974년 = 제 10회 서독 월드컵 개막. 예멘 공화국 무혈 쿠데타 발생
1982년 = 제 12회 스페인 월드컵 개막
1993년 = 킴 켐벨, 캐나다 사상 첫 여성총리에 임명
1994년 = 콜롬비아.멕시코.베네수엘라, 자유무역협정 체결
1997년 = 미국 연방법원, 95년 오클라호마시티 연방정부 청사 폭파해 168명 사망케한 테러범 티모시 맥베이에게 사형선고
2000년 = 김대중 대통령 평양방문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사상 첫 남북정상회담. 이탈리아, 81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저격한 터키 극우파 회교도 메메트 알리 아그자 사면
2002년 = 경기도 양주군에서 신효순.김미선 두 여중생 미2사단 궤도차량에 치여 사망. 6.13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 압승 민주당.자민련 참패. 중국당국, 베이징 주재 한국 영사관 진입한 탈북자들 강제 연행하고 제지하던 한국 외교관 폭행.
2003년 = SK 최태원회장, 부당내부거래 및 분식회계 등을 주도한 혐의로 3년 실형 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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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 엘스버그>

"역사는 이라크전쟁을 미국사의 가장 비참한 실수로 기록할 것이다. 양심적인 미국인들이 과거 내가 한 일을 다시 해주기 바란다." 

베트남을 전쟁 도발국가로 몰아 전쟁의 정당성을 강변하고 여론 조작만을 일삼고 조직적인 선전 활동을 하던 미국을 향해 '오랫동안 전쟁 기회를 엿보던 미국이 베트남을 선제공격한 전쟁 원인 제공자'라는 진실을 밝힌, 일명 펜타곤(미 국방부)페이퍼라는 보고서를 알려 미국 사회를 일시에 충격에 빠트렸던 전직 해군 장교 다니엘 엘스버그의 말이다.
엘스버그는 원래 베트남 전쟁을 지지하며 베트남전쟁에 깊숙이 관여하였으나 전쟁 이후 신념을 바꿨고 베트남 전쟁에 관한 보고서를 통째로 뉴욕 타임즈에 넘겨버렸다. 미국 정부는 엘스버그는 동성애자라고 공공연히 비난하며 스파이와 절도 등 12개의 중범죄 혐의로 기소하며 악의적인 공작을 이어가나 여론은 진실을 믿었고 법원은 무죄를 선고한다. 또한 미국 정부와 뉴욕타임즈 간의 국익 VS. 국민의 알권리  라는 재판으로 이어져 미국의 언론의 자유에 커다란 공헌을 한 사건으로 기록 되고 있다.

소위 "팬타곤페이퍼" 사건의 전말

펜타곤페이퍼는 제2차 세계대전 때부터 1968년 5월까지 인도차이나에서의 미국의 역할을 기록한 보고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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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서는 1967년 미국의 국방장관 로버트 S. 맥나마라의 책임하에 작성되었다. 매사추세츠공과대학 부설 국제연구소의 수석연구원이었던 다니엘 엘스버그는 정부의 허가를 받지 않고 이 문서들을 〈뉴욕 타임스 The New York Times〉에 제공했다. 총 47권으로 된 펜타곤 페이퍼는 약 3,000쪽에 달하는 설명과 4,000쪽의 부속서류로 구성되어 있으며, 완성하는 데 18개월이 걸렸다. 이 작업에 참여했던 엘스버그는 처음에는 인도차이나에서의 미국의 역할을 열렬히 지지했으나, 이 보고서 작성이 끝나갈 무렵에는 미국의 인도차이나 개입에 적극적으로 반대했다. 인도차이나에서의 미국의 저의를 폭로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낀 엘스버그는 이 보고서 가운데 주요부분을 언론에 누출시켰다.

1971년 6월 13일 〈뉴욕 타임스〉는 연방정부가 '최고 기밀서류'로 취급하고 있던 이 보고서를 바탕으로 연재기사를 게재하기 시작했다. 〈뉴욕 타임스〉에 3회분 기사가 실린 후 미국 법무부는 연방 제1심 법원으로부터 국가기밀서류의 공표를 금지시키는 임시명령을 얻어낼 수 있었는데, 이때 법무부는 이 보고서를 계속해서 국민들에게 보도한다면 미국의 안보이익에 '치명적이며 회복할 수 없는 손실'을 가져올 것이라고 주장했다. 〈뉴욕 타임스〉는 역시 이 보고서를 입수하고 있던 〈워싱턴 포스트 The Washington Post〉지와 연합하여 법원의 금지명령에 대항해 15일 동안 법정투쟁을 벌였고, 이 기간중 연재기사는 중단되었다. 1971년 6월 30일 미국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전억제 명령 사건(prior-restraint case)으로 간주된 이 재판에서 연방대법원은 6 대 3의 판결로 양 신문사에게 문제의 보고서를 다시 게재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했다. 또한 법원은 이 보고서의 공표를 제한하기 위한 연방정부의 주장이 정당화될 수 없다고 판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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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타임즈는 당시 이 보고서를  연재하면서 닉슨정부로 부터 수많은 압력과 회유를 받았다. 하지만 진정한 국민의 알권리를 위해 뉴욕타임즈는 닉슨정부에 대항하는 쪽을 선택하였다.
페이퍼는 수년 간에 걸쳐 베트남에 대한 미국의 개입증대를 둘러싸고, 그 법률적·도덕적 정당성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가 점증하고 있던 시기에 공표되었기 때문에 미국 내에서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 논쟁을 야기시켰다. 국가의 최고 기밀서류가 폭로되고 계속 연재되자 1972년 선거에서 재선을 노리고 있던 닉슨 행정부는 당황했다. 펜타곤 페이퍼의 폭로로 곤경에 처해 있던 닉슨은 엘스버그의 평판을 떨어뜨리기 위해 불법적인 수단을 동원했는데, 이러한 사실은 이후 워터게이트 사건의 조사중에 명백히 밝혀졌다
이러한 사건은 진정한 언론의 모습이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에 대해 많은 반성과 영향을 주게 되었다. 물론 현재의 뉴욕타임즈가 9.11 테러이후 정부의 정책에 대체로 순응하는 쪽으로 돌아서기는 했지만 말이다.

Posted on 2008.06.10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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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 10일 (화)


▲국내외 주요사건
1871년 = 신미양요 당시 미군 강화도 초지진(草芝鎭) 점령
1914년 = 조선총독부, 각급학교에 교련과목 신설. 독립운동가 박용만(朴容萬), 하와이에서 항일 군사단체인 대조선국민군단(大朝鮮國民軍團) 조직
1915년 = 영국, 독일식민지 카메룬 점령
1925년 = 일제, 조선에서 치안유지법 시행
1926년 = 조선 마지막 왕 순종(純宗)의 국장일(國葬日)에 때맞춰 서울에서 6.10 만세운동 발발
1940년 = 이탈리아, 프랑스.영국에 선전포고. 노르웨이, 2차대전 당시 독일군에 항복
1943년 = 공산주의 인터내셔널(Communist International)인 '코민테른' 해산
1946년 = 이탈리아, 공화제 정부 수립
1949년 = 정부, 권농일(勸農日) 제정
1950년 = 북한, 억류하고 있던 조만식(曺晩植) 선생과 구금된 남로당 간부 김삼용(金三龍)의 교환을 남한에 제의
1952년 = 유엔군, 거제도 포로수용소 폭동 진압
1954년 = 광주학생의거 기념탑 제막
1961년 = 정부, 국가재건최고회의법.중앙정보부법.농어촌고리채정리법 공포
1962년 = 정부, 제 2차 통화개혁 단행해 '환'을 '원'으로 바꾸고 10대 1로 평가 절하
1967년 = 서울대 법대생들, 6.8 부정선거 규탄 데모
1969년 = 베트콩, 월남에 임시혁명정부 수립
1973년 = 북한, 휴전선에서 대남비방 확성기 방송 재개
1974년 = 고려 강감찬(姜邯贊) 장군의 유적지 낙성대(落星垈), 서울 관악구 봉천동에 준공
1979년 = 팔레비 전 이란 국왕, 멕시코로 망명
1986년 = 김대중 민추협 공동의장.김영삼 신민당 고문, 직선제 개헌 요구
1987년 = 서울도심에서 정부의 호헌(護憲)방침 철회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 발생. 민정당, 전당대회에서 노태우 대표위원을 대선후보로 선출
1988년 = 포항제철(현 포스코) 주식, 국민주 1호로 증권거래소에 상장.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진도 5.2 강진 발생
1989년 = 건설부, 일산 등 전국 22곳 738만평을 택지개발예정지구로 고시
1990년 = 일본계 이민2세 알베르토 후지모리, 페루 대통령에 당선
1993년 = 경기도 연천 포병사격장서 폭발사고로 동원예비군과 현역장병 30여명 사상. 북한 동해안에서 사정 1천㎞ 미사일 발사실험 실시
1994년 =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 개관
1998년 = 제 16회 프랑스 월드컵 개막
1999년 = 북한 경비정 6척, 서해안 북방한계선(NLL) 침범. 유고 연방군, 코소보서 철군시작
2002년 = 박세리, 맥도널드LPGA챔피언십 우승 최연소 메이저 4승 기록
2003년 = 노동부 6급이하 공무원 107명 노조 설립 결의


낙성대는 말 그대로 별이 떨어진 터란 뜻으로 강감찬 장군의 옛 집터이다.
강감찬 장군은 귀주대첩을 거둔 명장으로 고려 초 중국사신이 이 곳을 지나다 하늘에서 큰 별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하도 기이해서 부하에게 '저 별이 떨어진 곳을 찾아보고 오라고' 명했다. 부하는 현재 낙성대 터를 찾아내었고, 그 집에서 태어난 아기가 바로 강감찬 장군이라고 한다. 그 후 마을 사람들이 그 자리에 3층 석탑을 세우고 '강감찬 낙성대'라는 글자를 새겨 놓았다. 1973년 1만여 평을 확보해 이듬해 6월에 조성한 낙성대 공원은 울창한 숲이 좋은데다 금붕어가 노는 연못까지 있다. 산수유, 목련, 철쭉이 번갈아 피는 이 곳은 계절 따라 피고 지는 꽃들이 볼 만하고, 가을엔 은행의 단풍도 멋지다. 벤치, 주차장, 광장, 야외놀이마당이 갖춰져 있어 봄, 가을이면 많은 시민들이 찾아온다. 24시간 개방되며, 야외예식장은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특히 데이트를 즐기는 연인들이 많이 찾는데, 공원을 끼고 도는 드라이브 코스는 인기가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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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의 위치는 봉천동이었으나 1973년 서울특별시 정화사업에 의하여 현재의 안국사로 옮겨졌다.

가는길 - 지하철 2호선 낙성대역 4번 출구

버스: 461,641,5411,5412,5413,5524 이용 낙성대역 하차 또는 관악02 낙성대 공원하차
지하철 : 서울2호선 낙성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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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on 2008.06.09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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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 9일 (월)
▲국내외 주요사건
1815년 = 유럽 200여개 국가.도시 대표들, 나폴레옹 전쟁 사후 처리위한 빈강화협약 체결
1885년 = 프랑스와 청나라, 톈진(天津) 강화조약 체결
1898년 = 영국, 청나라로부터 주룽(九龍)반도 조차
1904년 = 한일양국인민어채구역조례(韓日兩國人民漁採區域條例)) 고시
1909년 = 의병장 하상태, 장단(長湍)에서 일병의 습격을 받고 자결
1920년 = 원산부청(元山府廳) 직원들, 평민회 조직
1926년 = 한용운, 송세호, 6.10만세운동 계획 혐의로 선학원에서 검거
1929년 = 카네기재단 후원으로 미국 신문기자 일행 12명 내한
1953년 = 남한 각의, 남북휴전협정 거부 결의
1954년 = 한국일보 창간. 일본, 방위청 설치법 및 자위대법 공포. 제 3대 민의 원 선거
1959년 = 세계 최초의 원자력 잠수함인 미국의 '조지 워싱턴호' 진수
1967년 = 가말 아브델 나세르 이집트 대통령, 6일전쟁 참패 책임지고 사임
1976년 = 남한 적십자사, 북한 적십자에 추석성묘단 교류 제의
1981년 = 미국 하버드대에 한국학연구소 설립
1983년 = 김영삼 전신민당 총재, 민주화요구 단식 23일만에 중단
1987년 = 연세대생 이한열군, 교내시위도중 경찰 최루탄에 맞아 의식불명(7월 5일 사망)
1991년 = 필리핀 피나투보 화산 폭발 주민 754명 사망. 후세인 요르단 대통령, 정당결성 금지 33년만에 다당제 민주주의 도입 승인
2000년 = 롯데호텔 노조 파업
2001년 = 모하마드 하타미, 이란 대통령에 재선
2002년 = 임신부등 탈북자 3명, 베이징 한국영사관 진입 망명 요청        <출처 : 대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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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기자 정태원씨 촬영)

1987년 6월 9일 교문앞에서 시위 중이던 학 대학생이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부상을 입고 끝내 사망하는 일이 벌어졌다. 사건의 당사자인 이한열군은 전라남도 화순 출생으로 광주진흥고등학교를 나와 연세대 경영학과 2학년에 재학중이었다. 이한열군은 경찰이 쏜 최루탄에 머리를 맞고 세브란스 병원으로 옮겨 치료를 받았으나 1987년 7월 5일 뇌손상으로 사망하였다.

불안한 정국

전두환 대통령의 5공화국 집권 마지막해인 1987년은 연초부터 정국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후계자로 지목된 민정당의 노태후 후보를 내세워 간접선거(일명 체육관 선거)를 통해 집권연장을 하려던 당시 군부세력에 국민들은 온몸으로 거세게 저항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2월에 발생한 서울대생 박종철군에 대한 고문 치사 은폐사건은 마침내 국민들의 저항에 기름을 붓는 형국이 되었다. 하지만 전두환 대통령은 4.13 호헌조치를 통해 직선제 개헌을 하지 않고 당시의 간선제로 대통령을 선출할 것을 천명했으며 이에 항의하는 시민들이 마침내 거리로 나서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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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0일 서울 시청앞에 모인 시위 군중들


처음에는 대학생들만의 거리시위로 시작되었던 것이 박종철씨 고문치사 은폐사건을 거치며 재야단체와 여러 시민단체들이 연합해 1987년 6월 10일 [박종철씨 고문치사 은폐사건 규탄대회]를 열기로 하면서 전국민적인 저항으로 이어졌다. 이한열씨는 그 당시 내일로 예정되어 있던 규탄대회에 참가하기 위한 연세대 출정식에 참가 하였다가 교문진출을 시도하여 전경들과 대치하던 중 변을 당한 것이다. 이일을 계기로 우리가 지금 [6.10항쟁] 이라고 부르는 민주화 투쟁을 거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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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0항쟁

1987년 6월 10일에는 국민들은 거리에 모여 전두환 정권을 비판하고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는 반면 전두환대통령은 육사 11기 동기인 노태후씨를 대통령 후보로 지목하는 민정당 제4차 전당대회를 열고 있었다.서울시청 , 서울역,명동등에 모인 시민들은 "호헌철폐" , "독재타도"를 외치며 진압하는 전경들과 맞서고 있었다. 당시에는 학생들 뿐만이 아닌 연도에 있던 시민들 , 건물안에 있던 회사원들 까지 창문을 열고 같이 구호를 외쳤으며 거리행진하는 시위대에게 박수를 보냈다. 이렇게 진행된 6.10 항쟁은 6월 29일 노태후 당시 민정당 대통령 후보의 시국수습책인 [6.29 선언]을 이끌어 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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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9일 시국특별선언을 하는 당시 노태우 민정당 대통령 후보



역사는 퇴풀이 되는가?

2008년 대한민국 여름은 또다시 뜨겁게 시작하고 있다.
많은 시민들이 "쇠고기수입반대"와 "전면재협상"을 외치며 6월의 서울거리를 행진하고 있다.
20여년전의 그 때와는 시위 분위기와 양상도 사뭇 다르다. 돌과 화염병, 그리고 최루탄이 없어진 시위장.
하지만 나라를 걱정하고 국민들의 삶을 걱정해서 거리로 나와 자신의 주장을 외치는 사람들의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촛불집회 , 문화제 , 공연등의 그 표현 방법이 달라 졌을 뿐 민주주의를 위해 외치는 모습은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다. 헤겔은 변증법에서 역사는 나사선 모양으로 발전하며 되풀이 된다고 했다. 똑같은 위치이지만 예전보다는 한단계 업그레이드 된 위치에서의 반복이다. 국민들의 시위문화는 나선형으로 발전했는데 정부의 국민들 목소리에 귀 기울지 않는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 듯 해서 그것이 답답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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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on 2008.05.30 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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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5월 30일


▲국내외 주요사건
1431년 = 프랑스 성녀 잔다르크, 마녀로 몰려 19세 나이에 화형에 처해짐
1539년 = 스페인 탐험가 에르난도 데 소토, 아메리카 대륙 플로리다에 상륙
1814년 = 유럽국가들, 나폴레옹 전쟁 끝내는 파리강화조약 체결
1910년 = 일본 육군대장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3대 조선통감에 취임
1924년 = 독립운동가 노백린(盧伯麟),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총장(軍務總長.참모총장격)에 취임. 중국과 소련, 국교회복 협정 체결
1930년 = 만주 간도거주 조선인들, 반일 독립 무장봉기(5.30 간도사건)
1950년 = 제 2대 국회의원(민의원) 선거
1960년 = 32년간 독재한 도미니카 공화국 대통령 라파엘 트루히요, 정적에게 피살
1962년 =정치정화위원회, 정치활동 적격판정자 1천336명 공고. 제 7회 월드컵 대회, 칠레서 개막
1968년 = 김종필 공화당 의원, 당 의장 및 의원직 사퇴하고 정계은퇴 선언
1972년 = 일본 적군파 게릴라들, 이스라엘 텔아비브 공항서 자동화기 난사해 22 명 살해
1975년 = 국군, 휴전선 일대 전방 방위벽 구축 완료
1979년 = 신민당, 전당대회서 김영삼씨를 총재로 선출
1982년 = 스페인,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 16번째 회원국으로 가입
1995년 = 저인망 어선 '86우성호', 백령도 서북쪽 해상에서 북한군에 나포(그 과정에서 선원 8명중 3명이 북한 해군의 총격으로 사망)
1997년 = 한신공영 법정관리 신청. 국내 첫 소비자파산 선고
1998년 = 천주교 정진석(鄭鎭奭) 주교, 13대 서울 대교구 교구장과 제 9대 평양교구장 서리에 임명. 아프가니스탄에 강진, 주민 5천여명 사망
2000년 = 건교부, 준농림지 폐지 발표


파란만장한 삶 - 나폴레옹

나폴레옹 1세 (1769.8.15~182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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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중해 코르시카섬 아작시오 출생이다. 카를로 보나파르테와 레티치아 라몰리노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나기 바로 전 제노바는 코르시카를 프랑스에 할양했다. 그 뒤 코르시카 사람들은 프랑스의 점령에 저항했고 카를로 역시 파스콸레 파울리가 이끄는 코르시카 독립운동에 참여했으나 파올리가 망명하자 카를로는 프랑스인과 타협했다. 프랑스혁명의 사회적 격동기 후의 안정에 편승하여, 제1제정을 건설하였다. 군사·정치적 천재로서 세계사상 알렉산드로스대왕·카이사르와 비견된다. 아버지가 지도자 파올리를 따라 프랑스에 대한 코르시카 독립운동에 가담하나, 싸움에 진 뒤에는 도리어 프랑스 총독에게 접근하여 귀족의 대우를 받았다.

 1795년 10월 5일(방데미에르 13일), 파리에 반란이 일어나 국민공회(國民公會)가 위기에 직면하자, 바라스로부터 구원을 요청받고, 포격으로 폭도들을 물리쳤다.이 공적을 기회로, 1796년 3월 바라스의 정부(情婦)이자 사교계의 꽃이던 조제핀과 결혼, 총재정부로부터 이탈리아 원정군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이탈리아에서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하여 5월에 밀라노에 입성, 1797년 2월에는 만토바를 점령하는 전과를 올렸다. 10월 오스트리아와 캄포포르미오(Campoformio)조약을 체결하여, 이탈리아 각지에 프랑스혁명의 이상을 도입한 인민공화국을 건설하였다. 그의 명성은 프랑스에서도 한층 높아졌다. 하루 3시간만 잔다는 소문도 있었으나, 비서 브리센에 의하면 건강에 항상 신경을 써서 하루 8시간은 잤다고 한다.

  1798년 5월 5만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이집트를 원정하여 결국 카이로에 입성하였다. 7월 해군이 아부키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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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센 원정 중의 나폴레옹>

(灣)에서 영국함대에 패하여 본국과의 연락이 끊기자 혼자서 이집트를 탈출, 10월에 프랑스로 귀국하였다. 곧 그를 통해 총재정부를 타도하려는 셰이에스 ·탈레랑 등의 음모에 말려들었다. 1799년 11월 9일(브뤼메르 18일) 군을 동원, 500인회를 해산시켜 원로원으로부터 제1통령으로 임명되고, 군사독재가 시작되었다.

그의 독특한 통치방식은 혁명후의 안정을 지향하는 과도기의 사회상황에서 보나파르티즘이라는 나폴레옹의 정치방식이 확립되었다. 제1통령으로서 국정정비 ·법전편찬에 임하고, 대(對)오스트리아와의 결전을 서둘러 1800년 알프스를 넘어 마렝고에서 전승을 이룩하였다.

  1802년에는 영국과 아미앵화약을 맺고, 1804년 12월 인민투표로 황제에 즉위하여 제1제정을 폈다. 즉위소식을 들은 L.베토벤이 《영웅 교향곡》의 악보에서 펜을 던지고, ‘인민의 주권자도 역시 속물이었다’고 한탄하였다고 한다. 영국을 최대의 적으로 간주하던 그는 즉위하자, 곧 상륙작전을 계획하였다. 1805년 가을 프랑스함대는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H.넬슨의 영국해군에 다시 격파되어, 그의 웅도(雄圖)는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같은 해 12월 아우스터리츠전투에서 오스트리아 ·러시아군을 꺾은 이래, 프랑스육군은 전유럽을 제압하여 위광을 전세계에 떨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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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처음 유배지 엘바섬>

1809년 조제핀과 이혼, 이듬해 오스트리아 황녀 마리 루이즈와 재혼하였다. 그러나 1812년 러시아원정에 실패하면서 운세도 기울어져, 1814년 3월 영국 ·러시아 ·프러시아 ·오스트리아군에 의해 파리를 점령당하고, 그는 엘바섬으로 유배되었다.
1815년 엘바섬을 탈출. 그의 지지자들과 파리로 입성하여 다시 황제로 취임하였으나 워털루 전투에서 에서 웰링턴 장군이 이끄는 영국군에 패배하여 다시 대서양의 세인트 헬레나 섬에 유배되었고 그 곳에서 죽음을 맞이하였다.

나폴레옹에 관련된 재미있는 이야기

1. 나폴레옹 1세는 항상 재킷 안쪽으로 한 손을 넣고 있는 것으로 그려지는데, 그 이유는 만성적인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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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쪽 재킷에 손을 넣은 나폴레옹의 모습>

경성 가려움증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으며, 종종 복부의 아픈 부위를 피가 날 때까지 긁었다고 한다.

2. 나폴레옹은 프랑스에서 태어나지 않았고 이탈리아인 부모에게서 지중해 코르시카 섬에서 태어났다.

3. 나폴레옹의 치질은 워털루 전쟁의 패배에도 영향을 끼쳤는데, 말을 타고 전장을 순찰 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4. 알루미늄으로 만든 최초의 제품은 1850년대 나폴레옹 3세를 위해 만든 장난감 딸랑이였다고 한다. 나폴레옹도 자신의 최고 귀빈들에게 알루미늄으로 만든 포크와 나이프를 선물했다고 한다. 당시에 새로 발견된 이 금속은 아주 귀해서 금보다 더 소중하게 여겼다고 한다.

5. 보고에 의하면 나폴레옹은 군대 출정 시 항상 초콜릿을 가지고 가서 기운을 올릴 필요가 있을 때 때 먹었다고 한다.

6. 나폴레옹은 군대들이 배가 불러야 행진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1975년 음식 보관을 위한 실용적인 방식에 대한 시상을 제안했다. 그 상은 프랑스 발명가 니콜라스 아페르(Nicholas Appert)가 수생했다. 그가 고안한 것은 캉통 통조림이었고 오늘날 통조림 음식 산업의 시초가 되었다.

7. 고대에는 신부 드레스의 전통적인 색상은 붉은색이었는데, 나폴레옹 3세의 아내가 이 전통을 깨고 흰 가운을 입었다. 이후 신부들이 부의 상징으로 흰 가운을 입기 시작했다.

8.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 웰링턴  작이 워털루 전쟁에서 탄 말들의 이름은 각각 백마 종마인 ‘마렝고(Marengo)’와 구렁말인 ‘코펜하겐(Copenhagen)’이었는데, 이는 두 사람이 승리를 거둔 유명한 전장의 이름을 딴 것이다.

   ※ 마렝고 : 1800년 나폴레옹 1세가 오스트리아를 대파 한 곳.

9. 나폴레옹은 남자들이 여자의 스커트를 무릎까지 들어 올리면 35프랑과 허벅지까지 올리면 70프랑의 벌금을 물리는 규정을 제정했다.

10. 미국의 기밀국(U.S. Secret Service.)의 코드명 ‘나폴레옹’은 프랭크 시나트라(Frank Sinatra)이었다.

11. 나폴레옹은 전투 시 항상 검은 실크 손수건을 목에 둘렀는데, 워털루 전투에서 흰색 목도리를 착용했다가 그 전투에서 패했다.

13. 나폴레옹 1세는 흰 말을 너무 좋아해서 무려 50마리나 소유하고 있었다.

14. 나폴레옹은 수학자와 물리학자들은 총애했지만 인문주의자들은 말썽꾸리기로 여겨 배척했다고 한다.

15. 나폴레옹은 26세 이전에 이탈리아를 정복했다.

16. 나폴레옹은 고양이 공포증인 ‘아일루로포비아’(ailurophobia)를 겪었다고 한다.

17. 나폴레옹은 14,000개의 프랑스 법령을 단순화시켜 7개의 법률로 통합했다. 이는 현대 역사상 한 국가의 법을 모든 시민들에게 평등하게 적용되도록 한 최초의 조치였다. 나폴레옹의 7개 법률은 아주 인상적이어서 1960년까지 70개 이상의 정부들이 이 법을 본받아 쓰거나 그대로 사용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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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시절 프랑스여인이 요요를 하는 모습>

18. 나폴레옹의 강적인 웰링턴 공작은 능숙한 요요 선수였다고 한다. 당시 요요는 ‘반다로레’("bandalore")로 알려져 있었다.

19. 대부분 사람들이 나폴레옹이 키가 작다고 생각하지만, 실제 나폴레옹의 키는 167.6cm 이고 당시 프랑스 남성의 평균 키에 해당한다.

20. 나폴레옹의 음료수 컵 중 하나는 유명한 이탈리아 모험가 칼리오스트로(Cagliostro)의 해골로 만들었다고 한다.

21. 1978년의 한 조사에 의하면 그해 8월 14일에 방송된 한 프랑스 텔레비전 프로그램은 단 한명의 시청자도 없었다고 하는데, 그 프로그램은 40회 생일을 맞은 한 미국 여성과의 심층 인터뷰였는데, 그 여성이 남편과 만난 과정과 생활의 즐거움 등을 방영했다고 한다. TV 조사에 따르면 당시 시청자의 67%가 나폴레옹 1세의 풍속 드라마를 보았고, 나머지 33%는 다른 프로그램을 시청했는데, 한명의 시청자도 없었던 그 프로그램은 피크 타임에 방송되었다고 한다.

22.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 관련된 미국인들이 많다. 나폴레옹의 막내 동생 제로메(Jerome)는 미국인과 결혼했다. 기니피그("guinea pig")라는 어휘는 영국의 휘그 당원들이 나폴레옹 전쟁을 돕기 위해 낸 밀가루에 부과한 세금에서 유래되었다. 기니(영국의 금화)를 낸 사람 명단은 자신들의 교구 교회 문에 부착했으며, 이 사람들이 당시 부자들이었기 때문에 오늘날 ‘기니피그’로 알려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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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 시절 영국의 기니금화>


Posted on 2008.05.28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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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5월 28일(수)
▲국내외 주요사건
1901년 = 제주도에서 '이재수(李在守)의 난' 발생해 주민과의 충돌로 천주교도 700여명 피살
1905년 = 경부선 철도 개통식
1923년 = 미국 연방 법무장관, 원하는 여성들의 바지 착용 합법화
1935년 =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APF) 해산
1940년 = 벨기에, 2차대전 당시 독일군에 항복
1959년 = 미국 주피터 우주선, 원숭이 2마리 태운 우주비행 성공리에 마치고 지구 귀환
1961년 = 국가재건최고회의, 부정축재자처리요강 발표
1964년 =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창립
1973년 = 정부, 인공임신중절 등의 허용 시기와 한계를 규정한 모자보건법 시행령 공포
1980년 = 장훈 선수, 일본 프로야구사상 첫 3천개 안타 기록.
1981년 = 신군부 정권이 국민축제로 기획한 '국풍(國風)81', 서울 여의도에서 개막
1982년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영국 방문해 영국국교회(성공회)와 가톨릭교회 448년만에 화해
1984년 = 국제올림픽위원회(IOC), '88 서울 올림픽대회일정 승인
1985년 = 제 8차 남북적십자 본회담 12년만에 재개, 이산가족 고향방문과 예술단 상호방문에 합의
1986년 = 서울 올림픽공원 준공
1987년 = 구서독 청년 마티아스 루스트군, 세스나기를 몰고 핀란드를 출발 소련방공망 뚫고 모스크바 광장에 착륙해 세계를 놀라게 함
1988년 = 노태우 대통령, 3개 야당 총재들과 청와대 회동갖고 5공비리 등 현안해결 방안 논의
1989년 =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결성
1995년 = 러시아 사할린에 진도 7.2 강진 발생해 주민 3천500여명 사망
1998년 = 파키스탄, 인도의 핵실험에 대응 5차례의 지하 핵실험 실시
1999년 = 김대중대통령, 모스크바에서 한-러 정상회담
2000년 = 현대그룹, 현대건설 자산매각 등 구조조정계획 발표
2003년 = 대북송금 의혹 사건 관련 이기호 전 청와대 경제수석 긴급체포. SK글로벌 채권은행단, 법정관리 추진 결정

재일교포로서의 어려운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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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훈 선수는 한국이 해방될 무렵 1940년에 일본 히로시마에서 태어났다.그 당시 일본은 패전하고 경제와 정치가 매우 어수선한 상태였다. 한국 역시 오랜 일본의 식민기간으로 일본 못지 않게 어수선한 시기여서 일본에 있던 많은한국사람들이 일본에 남아 야만 했다. 이러한 어수선한 시기이다보니 다수의 일본사람들이한국사람을 핍박하여 매우 어렵게 지낼수 밖에 없었다.

장훈 선수 역시 마찬가지 였다.
고교재학시절 투수겸 4번타자로 이미 명성이 드높았으나, 한국인을 싫어했던 야구부 담당교사에 의해 교내 폭력사건의 주동자로 몰려 고시엔에 나가지 못하는 설움을 당했던 그는 1959년 고교졸업후 도에이 플라이어즈에 입단했다. 그해 .275의 타율을 기록하며 퍼시픽리그 신인왕을 차지하더니만 이듬해 바로 3할을 돌파했다. 이 시즌을 포함해 그는 총 16시즌에서 3할을 상회하는 타율을 기록한다. 1961년에는 생애 첫 타격왕타이틀(.336)을 따내고, 1962년에는 .333, 31홈런, 99타점, 23도루의 기록을 작성하며 마침내 퍼시픽리그 MVP에 올랐다. 아울러 소속팀 플라이어즈의 재팬시리즈 우승이라는 감격도 경험했다.
어렸을적 입은 화상으로 오른손의 두 손가락이 붙어버리는 장애를 딛고 이뤄낸 기록이라는 사실은 그의 업적을 더욱 위대하게 빛내준다. 더구나 그는 끝까지 귀화를 거부한 채 자랑스런 한국인으로 남았다.

3000안타의 대기록

1980년 5월 28일 일본 도쿄 근교 가와사키 야구장. 당시 롯데 마린스의 지명타자였던 그는 6회말 1사 2루의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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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0안타의 기록을 달성하던 순간>

에서 담장을 넘기는 홈런으로 3000안타의 위업을 달성했다. 그동안의 설움과 핍박을 일순간에 날려버리는 홈런이었다.장훈선수는 일본인들이 자신을 무시하고 차별할 때 이를 악물고 야구를 했다고 한다. 그에 이런 각오는 3000안타 이후의 인터뷰에도 잘 나와 있다.

“내가 치는 홈런과 안타 하나하나는 일본인에게 차별받고 멸시당하는 재일 조선인들의 가슴에 맺힌 응어리를 풀어주고 있으며 자랑스러운 우리 조선 동포들을 차별하는 비열한 일본인들에 대한 내 나름대로의 시원한 복수다.”

장훈 선수는 그 이후에도 은퇴때까지 85개의 안타를 추가로 더 기록했으며 은퇴후에는 TBS 에서 야구해설을 했다.또한 한국야구위원회 고문으로 활동하며 한국야구발전에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그가 위대했던건 단순히 3000안타를 달성했다는 기록적인 면이 아니라 온갖 시련과 역경을 이기고 차별과 멸시가 남무하던 일본에 자랑스런 한국인으로서 긍지를 보여 줬다는 점일 것이다.
이기록은 28년이 지난 지금도 일본 프로야구에서 깨지지 않고 있다. 참고로 미국 메이저리그의 기록은 피트 로즈가 1963년부터 1986년까지 23년동안 기록한 4256안타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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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기 장훈선수의 타격폼-일명 부채살타법>

장훈선수 통산기록

통산 출장경기-2752경기(역대 3위)
통산 타율- .31915(역대 3위)
통산 안타- 3085개(역대 1위)
통산 홈런- 504개(역대 7위)
통산 타점- 1676 타점(역대 4위)
통산 도루- 319 도루(역대 20위)
통산 희생타- 4개
통산희생 플라이- 90개(역대 5위)
통산 사구- 1274개(역대 3위)
통산 데드볼- 78개
통산 삼진- 815 삼진
통산 병살타- 145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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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훈선수와 이승엽선수>



Posted on 2008.05.27 11:57
Filed Under 역사 이야기

2008년 5월 27일(화)

▲국내외 주요사건

1905년 = 러시아 발트함대, 동해서 일본해군에 궤멸

1906년 = 대한제국, 의병해산조칙(義兵解散詔勅) 내림

1927년 = 신간회 자매단체인 근우회(槿友會), 김활란(金活蘭) 박사 등의 주도로 창립

1933년 = 미국 시카고 만국 박람회 개막

1934년 = 제 2회 월드컵, 이탈리아에서 개막

1937년 =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금문교(金門橋) 개통

1941년 = 영국 해군, 프랑스 근해에서 독일 최대전함 비스마르크호 격침시켜 2천300여명 사망

1946년 = 미군정, 서울에서 공창제 폐지

1949년 = 칠레, 대한민국 승인

1961년 = 정부, 부흥부를 건설부로 개칭

1963년 = 민주공화당, 대통령 후보에 박정희(朴正熙) 지명

1966년 = 일본, 약탈 한국 문화재 1천300여점 반환

1967년 = 경인고속도로 기공

1968년 = 제 1차 한.미 국방장관 회담, 워싱턴서 열림

1969년 = 구엔 반 티우 월남 대통령 방한

1979년 =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과 메나헴 베긴 이스라엘 총리, 양국 국경개방 발표

1980년 = 비상계엄군, 광주민주화 운동 무력 진압

1987년 = 미국과 베트남, 양국관계 정상화 합의

1988년 = 평화의 댐 1단계 준공. 미국상원, 중거리 핵미사일 폐기협정 비준

1994년 = 러시아 반체제 작가 알렉산데르 솔제니친, 해외망명 20년만에 귀국

1996년 =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 휴전협상 위해 체첸 반군지도자와 사상 첫 대면

1998년 = 민주노총, 시한부 총파업 돌입. 일본왕 아키히토(明仁), 영국 방문중 태평양 전쟁때 일본군이 영국군 포로에 가한 가혹행위에 대해 유감 표명

1999년 = 정부, 플라스틱으로 만든 새 주민등록증 발급. 유엔전범재판소, 현직 국가원수로는 최초로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유고 대통령을 전범혐의로 기소

2002년 =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서울대 법대 최종길(崔鍾吉) 교수 '의문사'로 인정

                                                 <출처:대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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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더 록 의 한장면>

영화 007시리즈에 자주 등장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007의 주인공이었던 "숀 코넬리"가 나오는 영화 "The Rock"에서도 등장하는데 이 영화의 배경 알카트라즈 아일랜드 옆에 나오는 붉은 교량이 바로 Golden Gate Bridge 이다.
원래 이 다리의 색상은 연한 빨강과 진한 홍색 쯤인데.. 이 다리가 노을이 질 때 그 빛을 받으면 금색깔이 된다고 해서 Golden Gate Brige가 되었다고 한다. 한편으로 이다리에서 약 1000명이 자살을 했다는 악명도 붙여져 있다.


길이는 2,825m, 너비는 27m이다. 남안의 샌프란시스코와 북안의 마린반도를 연결하는 최단거리에 놓인 현수교로, 조셉 B.스트라우스가 설계하였고, 1933년에 착공하여 1937년에 준공하였다. 공사비용은 3,500만 달러가 들었다. 차고 거센 조류와 안개가 많은 날씨 그리고 수면 아래 지형이 복잡하여 건설이 불가능할 것으로 예측되었으나 4년 만에 완공하여, 미국 토목학회에서 7대 불가사의의 하나로 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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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질 무렵의 금문교 풍경>


다리를 만든 철근 와이어는 케이블 길이가 2331.7 미터 이고  케이블 직경이 92.4 센티미터 이다. 사람키의 절반 만한 굵기 이다.
그리고 그것은 아주 얇은 27,572 개의 케이블을 꼬아서 만든 큰 케이블이다. 그 전체의 와이어의 길이는 128,748 키로미터 길이의 강선을 꼬아서 만든것이다. 그 다리를 지탱하고 있는 큰 와이어안에 수천가닥의 강철선들이 꼬여서 만들어 진것이다. 케이블 만의 무게가 24,500 톤이나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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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문교 공사에 사용되었던 철제케이블의 모습>


금문교는 재미 있는 제한이 많다. 다리는 4-10월 사이에는 아침 5시부터 밤 9시까지 걸어갈수 있다.
밤에는 걸어서 넘어갈수 없고, 다음날 아침  5 시가 되어야 걸어서 넘어 갈수 있다.
다리에선 롤러 블레이드와 스케이트보드, 롤러 스케이트 는 타고 갈수 없다. 자전거도 제한을 해서 건너 다닌다.
동쪽길로는  아침 5 시 부터 저녁 3 시 반까지만 건너 갈수 있고, 서쪽길로는 오후 3 시 반부터 밤 9시 까지만 넘어갈수 있다.
주말과휴일에는 서쪽길로는 아침 5 시부터 저녁 9시 동쪽길로는 저녁 9시부터 아침 5 시사이에 갈수 있다.
다리위에서는 교통 제한 속도가 45 마일 이면서 다리를 건너서 샌프란시스코로 들어올때에 5불을 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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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는 준공후 철저한 유지,관리로 한해도 거르지 않고 보수,보강 공사를 하며 다리 양쪽에는 공원을 조성해 많은 관람객들을 유치하고 있다. 또한 금문교를 배경으로 또는 금문교가 나오는 영화들도 많이 제작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것으로는 007뷰투어킬 A View to a Kill (1985), 골든 게이트 Golden Gate (1994), 존 슐레진저 감독의 <퍼시픽 하이츠 Pacific Heights (1990)>, 유위강 감독의 <소살리토 一見鍾情 / Sausalito (2000)>, 필 조아누 감독의 <최종분석 Final Analysis (1992)>, 마이클 베이 감독의 <더 록 The Rock (1996)>, 알프렛 히치콕 감독의 <현기증 Vertigo (1958)>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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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속의 금문교>



Posted on 2008.05.23 10:19
Filed Under 역사 이야기

2008년 5월 23일
▲1920년=인도네시아에서 아시아 최초로 공산당 창당
▲1939년=영국의회, 팔레스타인이 1949년까지 독립하는 계획 승인
▲1960년=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 2차대전 당시 유대인 학살 주도한 전 나치 지도자 아돌프 아이히만 체포
▲1985년=대학생 73명, 광주민주화운동 진압과 관련 미국의 사과 요구하며 서울 미문화원 점거 농성
▲2003년=5차 남북 경협추진위, 쌀 지원, 경의선 동해선 연결관련 합의


                                                                                          < 출처 : 대전일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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