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on 2008.05.30 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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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5월 30일


▲국내외 주요사건
1431년 = 프랑스 성녀 잔다르크, 마녀로 몰려 19세 나이에 화형에 처해짐
1539년 = 스페인 탐험가 에르난도 데 소토, 아메리카 대륙 플로리다에 상륙
1814년 = 유럽국가들, 나폴레옹 전쟁 끝내는 파리강화조약 체결
1910년 = 일본 육군대장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3대 조선통감에 취임
1924년 = 독립운동가 노백린(盧伯麟),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총장(軍務總長.참모총장격)에 취임. 중국과 소련, 국교회복 협정 체결
1930년 = 만주 간도거주 조선인들, 반일 독립 무장봉기(5.30 간도사건)
1950년 = 제 2대 국회의원(민의원) 선거
1960년 = 32년간 독재한 도미니카 공화국 대통령 라파엘 트루히요, 정적에게 피살
1962년 =정치정화위원회, 정치활동 적격판정자 1천336명 공고. 제 7회 월드컵 대회, 칠레서 개막
1968년 = 김종필 공화당 의원, 당 의장 및 의원직 사퇴하고 정계은퇴 선언
1972년 = 일본 적군파 게릴라들, 이스라엘 텔아비브 공항서 자동화기 난사해 22 명 살해
1975년 = 국군, 휴전선 일대 전방 방위벽 구축 완료
1979년 = 신민당, 전당대회서 김영삼씨를 총재로 선출
1982년 = 스페인,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 16번째 회원국으로 가입
1995년 = 저인망 어선 '86우성호', 백령도 서북쪽 해상에서 북한군에 나포(그 과정에서 선원 8명중 3명이 북한 해군의 총격으로 사망)
1997년 = 한신공영 법정관리 신청. 국내 첫 소비자파산 선고
1998년 = 천주교 정진석(鄭鎭奭) 주교, 13대 서울 대교구 교구장과 제 9대 평양교구장 서리에 임명. 아프가니스탄에 강진, 주민 5천여명 사망
2000년 = 건교부, 준농림지 폐지 발표


파란만장한 삶 - 나폴레옹

나폴레옹 1세 (1769.8.15~182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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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중해 코르시카섬 아작시오 출생이다. 카를로 보나파르테와 레티치아 라몰리노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나기 바로 전 제노바는 코르시카를 프랑스에 할양했다. 그 뒤 코르시카 사람들은 프랑스의 점령에 저항했고 카를로 역시 파스콸레 파울리가 이끄는 코르시카 독립운동에 참여했으나 파올리가 망명하자 카를로는 프랑스인과 타협했다. 프랑스혁명의 사회적 격동기 후의 안정에 편승하여, 제1제정을 건설하였다. 군사·정치적 천재로서 세계사상 알렉산드로스대왕·카이사르와 비견된다. 아버지가 지도자 파올리를 따라 프랑스에 대한 코르시카 독립운동에 가담하나, 싸움에 진 뒤에는 도리어 프랑스 총독에게 접근하여 귀족의 대우를 받았다.

 1795년 10월 5일(방데미에르 13일), 파리에 반란이 일어나 국민공회(國民公會)가 위기에 직면하자, 바라스로부터 구원을 요청받고, 포격으로 폭도들을 물리쳤다.이 공적을 기회로, 1796년 3월 바라스의 정부(情婦)이자 사교계의 꽃이던 조제핀과 결혼, 총재정부로부터 이탈리아 원정군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이탈리아에서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하여 5월에 밀라노에 입성, 1797년 2월에는 만토바를 점령하는 전과를 올렸다. 10월 오스트리아와 캄포포르미오(Campoformio)조약을 체결하여, 이탈리아 각지에 프랑스혁명의 이상을 도입한 인민공화국을 건설하였다. 그의 명성은 프랑스에서도 한층 높아졌다. 하루 3시간만 잔다는 소문도 있었으나, 비서 브리센에 의하면 건강에 항상 신경을 써서 하루 8시간은 잤다고 한다.

  1798년 5월 5만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이집트를 원정하여 결국 카이로에 입성하였다. 7월 해군이 아부키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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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센 원정 중의 나폴레옹>

(灣)에서 영국함대에 패하여 본국과의 연락이 끊기자 혼자서 이집트를 탈출, 10월에 프랑스로 귀국하였다. 곧 그를 통해 총재정부를 타도하려는 셰이에스 ·탈레랑 등의 음모에 말려들었다. 1799년 11월 9일(브뤼메르 18일) 군을 동원, 500인회를 해산시켜 원로원으로부터 제1통령으로 임명되고, 군사독재가 시작되었다.

그의 독특한 통치방식은 혁명후의 안정을 지향하는 과도기의 사회상황에서 보나파르티즘이라는 나폴레옹의 정치방식이 확립되었다. 제1통령으로서 국정정비 ·법전편찬에 임하고, 대(對)오스트리아와의 결전을 서둘러 1800년 알프스를 넘어 마렝고에서 전승을 이룩하였다.

  1802년에는 영국과 아미앵화약을 맺고, 1804년 12월 인민투표로 황제에 즉위하여 제1제정을 폈다. 즉위소식을 들은 L.베토벤이 《영웅 교향곡》의 악보에서 펜을 던지고, ‘인민의 주권자도 역시 속물이었다’고 한탄하였다고 한다. 영국을 최대의 적으로 간주하던 그는 즉위하자, 곧 상륙작전을 계획하였다. 1805년 가을 프랑스함대는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H.넬슨의 영국해군에 다시 격파되어, 그의 웅도(雄圖)는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같은 해 12월 아우스터리츠전투에서 오스트리아 ·러시아군을 꺾은 이래, 프랑스육군은 전유럽을 제압하여 위광을 전세계에 떨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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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처음 유배지 엘바섬>

1809년 조제핀과 이혼, 이듬해 오스트리아 황녀 마리 루이즈와 재혼하였다. 그러나 1812년 러시아원정에 실패하면서 운세도 기울어져, 1814년 3월 영국 ·러시아 ·프러시아 ·오스트리아군에 의해 파리를 점령당하고, 그는 엘바섬으로 유배되었다.
1815년 엘바섬을 탈출. 그의 지지자들과 파리로 입성하여 다시 황제로 취임하였으나 워털루 전투에서 에서 웰링턴 장군이 이끄는 영국군에 패배하여 다시 대서양의 세인트 헬레나 섬에 유배되었고 그 곳에서 죽음을 맞이하였다.

나폴레옹에 관련된 재미있는 이야기

1. 나폴레옹 1세는 항상 재킷 안쪽으로 한 손을 넣고 있는 것으로 그려지는데, 그 이유는 만성적인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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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쪽 재킷에 손을 넣은 나폴레옹의 모습>

경성 가려움증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으며, 종종 복부의 아픈 부위를 피가 날 때까지 긁었다고 한다.

2. 나폴레옹은 프랑스에서 태어나지 않았고 이탈리아인 부모에게서 지중해 코르시카 섬에서 태어났다.

3. 나폴레옹의 치질은 워털루 전쟁의 패배에도 영향을 끼쳤는데, 말을 타고 전장을 순찰 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4. 알루미늄으로 만든 최초의 제품은 1850년대 나폴레옹 3세를 위해 만든 장난감 딸랑이였다고 한다. 나폴레옹도 자신의 최고 귀빈들에게 알루미늄으로 만든 포크와 나이프를 선물했다고 한다. 당시에 새로 발견된 이 금속은 아주 귀해서 금보다 더 소중하게 여겼다고 한다.

5. 보고에 의하면 나폴레옹은 군대 출정 시 항상 초콜릿을 가지고 가서 기운을 올릴 필요가 있을 때 때 먹었다고 한다.

6. 나폴레옹은 군대들이 배가 불러야 행진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1975년 음식 보관을 위한 실용적인 방식에 대한 시상을 제안했다. 그 상은 프랑스 발명가 니콜라스 아페르(Nicholas Appert)가 수생했다. 그가 고안한 것은 캉통 통조림이었고 오늘날 통조림 음식 산업의 시초가 되었다.

7. 고대에는 신부 드레스의 전통적인 색상은 붉은색이었는데, 나폴레옹 3세의 아내가 이 전통을 깨고 흰 가운을 입었다. 이후 신부들이 부의 상징으로 흰 가운을 입기 시작했다.

8.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 웰링턴  작이 워털루 전쟁에서 탄 말들의 이름은 각각 백마 종마인 ‘마렝고(Marengo)’와 구렁말인 ‘코펜하겐(Copenhagen)’이었는데, 이는 두 사람이 승리를 거둔 유명한 전장의 이름을 딴 것이다.

   ※ 마렝고 : 1800년 나폴레옹 1세가 오스트리아를 대파 한 곳.

9. 나폴레옹은 남자들이 여자의 스커트를 무릎까지 들어 올리면 35프랑과 허벅지까지 올리면 70프랑의 벌금을 물리는 규정을 제정했다.

10. 미국의 기밀국(U.S. Secret Service.)의 코드명 ‘나폴레옹’은 프랭크 시나트라(Frank Sinatra)이었다.

11. 나폴레옹은 전투 시 항상 검은 실크 손수건을 목에 둘렀는데, 워털루 전투에서 흰색 목도리를 착용했다가 그 전투에서 패했다.

13. 나폴레옹 1세는 흰 말을 너무 좋아해서 무려 50마리나 소유하고 있었다.

14. 나폴레옹은 수학자와 물리학자들은 총애했지만 인문주의자들은 말썽꾸리기로 여겨 배척했다고 한다.

15. 나폴레옹은 26세 이전에 이탈리아를 정복했다.

16. 나폴레옹은 고양이 공포증인 ‘아일루로포비아’(ailurophobia)를 겪었다고 한다.

17. 나폴레옹은 14,000개의 프랑스 법령을 단순화시켜 7개의 법률로 통합했다. 이는 현대 역사상 한 국가의 법을 모든 시민들에게 평등하게 적용되도록 한 최초의 조치였다. 나폴레옹의 7개 법률은 아주 인상적이어서 1960년까지 70개 이상의 정부들이 이 법을 본받아 쓰거나 그대로 사용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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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시절 프랑스여인이 요요를 하는 모습>

18. 나폴레옹의 강적인 웰링턴 공작은 능숙한 요요 선수였다고 한다. 당시 요요는 ‘반다로레’("bandalore")로 알려져 있었다.

19. 대부분 사람들이 나폴레옹이 키가 작다고 생각하지만, 실제 나폴레옹의 키는 167.6cm 이고 당시 프랑스 남성의 평균 키에 해당한다.

20. 나폴레옹의 음료수 컵 중 하나는 유명한 이탈리아 모험가 칼리오스트로(Cagliostro)의 해골로 만들었다고 한다.

21. 1978년의 한 조사에 의하면 그해 8월 14일에 방송된 한 프랑스 텔레비전 프로그램은 단 한명의 시청자도 없었다고 하는데, 그 프로그램은 40회 생일을 맞은 한 미국 여성과의 심층 인터뷰였는데, 그 여성이 남편과 만난 과정과 생활의 즐거움 등을 방영했다고 한다. TV 조사에 따르면 당시 시청자의 67%가 나폴레옹 1세의 풍속 드라마를 보았고, 나머지 33%는 다른 프로그램을 시청했는데, 한명의 시청자도 없었던 그 프로그램은 피크 타임에 방송되었다고 한다.

22.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 관련된 미국인들이 많다. 나폴레옹의 막내 동생 제로메(Jerome)는 미국인과 결혼했다. 기니피그("guinea pig")라는 어휘는 영국의 휘그 당원들이 나폴레옹 전쟁을 돕기 위해 낸 밀가루에 부과한 세금에서 유래되었다. 기니(영국의 금화)를 낸 사람 명단은 자신들의 교구 교회 문에 부착했으며, 이 사람들이 당시 부자들이었기 때문에 오늘날 ‘기니피그’로 알려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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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 시절 영국의 기니금화>


Posted on 2008.05.28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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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5월 28일(수)
▲국내외 주요사건
1901년 = 제주도에서 '이재수(李在守)의 난' 발생해 주민과의 충돌로 천주교도 700여명 피살
1905년 = 경부선 철도 개통식
1923년 = 미국 연방 법무장관, 원하는 여성들의 바지 착용 합법화
1935년 =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APF) 해산
1940년 = 벨기에, 2차대전 당시 독일군에 항복
1959년 = 미국 주피터 우주선, 원숭이 2마리 태운 우주비행 성공리에 마치고 지구 귀환
1961년 = 국가재건최고회의, 부정축재자처리요강 발표
1964년 =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창립
1973년 = 정부, 인공임신중절 등의 허용 시기와 한계를 규정한 모자보건법 시행령 공포
1980년 = 장훈 선수, 일본 프로야구사상 첫 3천개 안타 기록.
1981년 = 신군부 정권이 국민축제로 기획한 '국풍(國風)81', 서울 여의도에서 개막
1982년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영국 방문해 영국국교회(성공회)와 가톨릭교회 448년만에 화해
1984년 = 국제올림픽위원회(IOC), '88 서울 올림픽대회일정 승인
1985년 = 제 8차 남북적십자 본회담 12년만에 재개, 이산가족 고향방문과 예술단 상호방문에 합의
1986년 = 서울 올림픽공원 준공
1987년 = 구서독 청년 마티아스 루스트군, 세스나기를 몰고 핀란드를 출발 소련방공망 뚫고 모스크바 광장에 착륙해 세계를 놀라게 함
1988년 = 노태우 대통령, 3개 야당 총재들과 청와대 회동갖고 5공비리 등 현안해결 방안 논의
1989년 =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결성
1995년 = 러시아 사할린에 진도 7.2 강진 발생해 주민 3천500여명 사망
1998년 = 파키스탄, 인도의 핵실험에 대응 5차례의 지하 핵실험 실시
1999년 = 김대중대통령, 모스크바에서 한-러 정상회담
2000년 = 현대그룹, 현대건설 자산매각 등 구조조정계획 발표
2003년 = 대북송금 의혹 사건 관련 이기호 전 청와대 경제수석 긴급체포. SK글로벌 채권은행단, 법정관리 추진 결정

재일교포로서의 어려운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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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훈 선수는 한국이 해방될 무렵 1940년에 일본 히로시마에서 태어났다.그 당시 일본은 패전하고 경제와 정치가 매우 어수선한 상태였다. 한국 역시 오랜 일본의 식민기간으로 일본 못지 않게 어수선한 시기여서 일본에 있던 많은한국사람들이 일본에 남아 야만 했다. 이러한 어수선한 시기이다보니 다수의 일본사람들이한국사람을 핍박하여 매우 어렵게 지낼수 밖에 없었다.

장훈 선수 역시 마찬가지 였다.
고교재학시절 투수겸 4번타자로 이미 명성이 드높았으나, 한국인을 싫어했던 야구부 담당교사에 의해 교내 폭력사건의 주동자로 몰려 고시엔에 나가지 못하는 설움을 당했던 그는 1959년 고교졸업후 도에이 플라이어즈에 입단했다. 그해 .275의 타율을 기록하며 퍼시픽리그 신인왕을 차지하더니만 이듬해 바로 3할을 돌파했다. 이 시즌을 포함해 그는 총 16시즌에서 3할을 상회하는 타율을 기록한다. 1961년에는 생애 첫 타격왕타이틀(.336)을 따내고, 1962년에는 .333, 31홈런, 99타점, 23도루의 기록을 작성하며 마침내 퍼시픽리그 MVP에 올랐다. 아울러 소속팀 플라이어즈의 재팬시리즈 우승이라는 감격도 경험했다.
어렸을적 입은 화상으로 오른손의 두 손가락이 붙어버리는 장애를 딛고 이뤄낸 기록이라는 사실은 그의 업적을 더욱 위대하게 빛내준다. 더구나 그는 끝까지 귀화를 거부한 채 자랑스런 한국인으로 남았다.

3000안타의 대기록

1980년 5월 28일 일본 도쿄 근교 가와사키 야구장. 당시 롯데 마린스의 지명타자였던 그는 6회말 1사 2루의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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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0안타의 기록을 달성하던 순간>

에서 담장을 넘기는 홈런으로 3000안타의 위업을 달성했다. 그동안의 설움과 핍박을 일순간에 날려버리는 홈런이었다.장훈선수는 일본인들이 자신을 무시하고 차별할 때 이를 악물고 야구를 했다고 한다. 그에 이런 각오는 3000안타 이후의 인터뷰에도 잘 나와 있다.

“내가 치는 홈런과 안타 하나하나는 일본인에게 차별받고 멸시당하는 재일 조선인들의 가슴에 맺힌 응어리를 풀어주고 있으며 자랑스러운 우리 조선 동포들을 차별하는 비열한 일본인들에 대한 내 나름대로의 시원한 복수다.”

장훈 선수는 그 이후에도 은퇴때까지 85개의 안타를 추가로 더 기록했으며 은퇴후에는 TBS 에서 야구해설을 했다.또한 한국야구위원회 고문으로 활동하며 한국야구발전에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그가 위대했던건 단순히 3000안타를 달성했다는 기록적인 면이 아니라 온갖 시련과 역경을 이기고 차별과 멸시가 남무하던 일본에 자랑스런 한국인으로서 긍지를 보여 줬다는 점일 것이다.
이기록은 28년이 지난 지금도 일본 프로야구에서 깨지지 않고 있다. 참고로 미국 메이저리그의 기록은 피트 로즈가 1963년부터 1986년까지 23년동안 기록한 4256안타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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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기 장훈선수의 타격폼-일명 부채살타법>

장훈선수 통산기록

통산 출장경기-2752경기(역대 3위)
통산 타율- .31915(역대 3위)
통산 안타- 3085개(역대 1위)
통산 홈런- 504개(역대 7위)
통산 타점- 1676 타점(역대 4위)
통산 도루- 319 도루(역대 20위)
통산 희생타- 4개
통산희생 플라이- 90개(역대 5위)
통산 사구- 1274개(역대 3위)
통산 데드볼- 78개
통산 삼진- 815 삼진
통산 병살타- 145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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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훈선수와 이승엽선수>



Posted on 2008.05.23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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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5월 23일
▲1920년=인도네시아에서 아시아 최초로 공산당 창당
▲1939년=영국의회, 팔레스타인이 1949년까지 독립하는 계획 승인
▲1960년=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 2차대전 당시 유대인 학살 주도한 전 나치 지도자 아돌프 아이히만 체포
▲1985년=대학생 73명, 광주민주화운동 진압과 관련 미국의 사과 요구하며 서울 미문화원 점거 농성
▲2003년=5차 남북 경협추진위, 쌀 지원, 경의선 동해선 연결관련 합의


                                                                                          < 출처 : 대전일보 >

Posted on 2008.05.21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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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5월 21일(수)
▲국내외 주요사건
1902년 = 개성-한양 전화 개통. 일본 제일은행 부산지점, 1원권을 발행 조선에서 유통시킴
1947년 =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 개막(7월 10일 결렬)
1956년 = 미국, 비키니섬에서 수소폭탄 실험 성공
1960년 = 정부, 내각책임제 개헌안 공고
1961년 = 군사혁명정부, 용공분자 2천여명과 깡패 4천200여명 검거 발표
1963년 = 무장군인들, 서울법원에 난입 데모학생 영장발부 요구
1977년 = 지미 카터 미대통령, 주한미군 철군계획 반대한 주한미군 참모장 존 싱글러브 소장 해임
1980년 = 박충훈(朴忠勳) 국무총리 서리 취임
1981년 = 새세대육영회 창립(회장 이순자)
1989년 = '89 국제로터리 클럽 세계대회 서울서 개막
1991년 = 인도 라지브 간디 총리, 유세도중 폭탄테러로 피살
1998년 = 32년 장기집권한 수하르토 인도네시아 대통령, 반정부 시위로 사임
 



한가로운 휴향지가 될 수 있었던 비키니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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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키니섬의 현재 모습>

비키니 섬. 정확히는 비키니 환초 (Bikini Atoll)는 서태평양 미크로네시아의 마샬제도 북부에 있는 환초이다.
랄리크 열도(列島)에 속하며, 북위 11 °35', 동경 165 °25'에 위치한다. 비키니 ·에뉴 ·나무 등 약 20개의 환초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것들에 둘러싸인 초호(礁湖)는 길이 34 km, 너비 17 km에 달한다. 환상적인 풍경을 자랑하며 유명한 휴향지가 될 수 있었던 이 섬의 운명은 1946년 미국의 원자탄 실험으로 한 순간에 뒤바뀌게 되었다.

1946년 미국은 비키니섬의 주민 176명을 강제로 몰아내고 섬에 돼지와 양을 풀어놨다. 핵 위력에 대한 생체 반응을 실험하기 위해서였다. 바다에는 파괴력을 알아보기 위해 패전국 일본과 독일 전함 20여 척을 띄웠다. 그리고 1946년 7월 1일... B-29 폭격기로 비키니섬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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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초의 원폭 공개 실험이었다.동서 35킬로미터, 남북 28킬로미터 아름답던 비키니 환초는 한순간에 불바다가 됐다. 모든 전함과 구조물은 파괴됐고 생물들은 방사능에 노출됐다. 46년 7월부터 58년까지 모두 23세차례의 핵폭탄 실험이 있었다 그중 1954년에 행해진 수소폭탄 실험에서는 섬 3개가 사라졌다.

비키니의 유래

1946년 란제리 상점을 운영하던 프랑스의 루이 레아드는 배꼽을 드러낸 수영복을 세상에 내놓았다. 당시엔 모델을 구하지 못해 스트립 댄서에게 입혀 광고할 정도로 논란이 됐다. 바티칸은 “부도덕한 의상”이라고 비난했고 스페인·이탈리아에선 아예 착용을 금지했다. 비키니란 이름은 지구 반대편 태평양의 환초에서 가져다 붙였다. 핵실험만큼 충격적인 패션이라는 이유에서였다.

비키니섬의 내일

1946년 섬에서 쫓겨나 난민생활을 하던 비키니 원주민들은 1968년 20여년만에 고향에 돌아왔다. 물론 미국은 안전을 장담했다. 그러나 갑상선암과 위암 환자가 늘어나더니 폐암 환자에다가 급기야 기형아가 태어나기도 했다. 6년뒤인 1974년 비키니 원주민들은 어쩔 수 없이 또 다시 섬을 떠나야만 했다.

현재 비키니 주민들과 미국정부는 비키니 섬을 되살리기 위한 협력을 하고 있다. 하지만 아무도 이 섬이 원상태로 돌아오는 데 얼마나 걸릴지 모른다. 섬에 지천으로 널린 코코넛(실험 이후 심은 나무) 열매와 바다가재, 조개등을 언제 먹을 수 있는지 아직은 확신이 없다.
인간의 탐욕이 인간의 파괴본능이 자연에게 커다란 죄를 짓고 있는 곳 . 바로 비키니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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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키니섬의 세 스핑크스 : 달리가 비키섬의 핵폭탄실험에 영감을 얻어 제작한 작품>



 

Posted on 2008.05.20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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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우병 !! 논란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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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역사나 문학에 관련된 분야가 아닌 다른 분야에 관련된 책을 사는 것도 참 오랜만 인거 같다.
친구와 약속이 있어 종로로 나갔던 난 잠시 기다리는 시간을 틈내 오랜만에 서점에 들어가게 되었다.
예전 처럼 주로 역사에 관련된 소설 코너를 둘러보던 난 그 옆 베스트셀러 가판대에 있는 한 책의 표지를 보고 한 참을 망설이게 되었다.
"얼굴 없는 공포, 광우병 그리고 숨겨진 치매 "
광우병 !!  요즘 참 지긋지긋하게 듣는 말이다. 즐겨보는 100분토론에서도 새벽까지 가는 끝장토론으로 한번 다룬적이 있고 중고등학생들 까지 촛불집회에 불러 모은 참으로 메가톤 급의 단어가 책의 표지를 장식하고 있었다.
책값의 압박으로 약간 주저하기는 했지만  결국 난 이책을 들고 계산대로 향했다.

8년간 광우병을 추적한 한 과학자의 다큐멘타리

책을 읽는 내내 마치 다큐멘타리 영화를 보는 느낌이 들었다.광우병에 대한 전문용어와 지식으로 나열된 일반 사회과학 서적을 예상했던 내생각은 첫장 부터 완전히 빗나가 버렸다.
생화학자인 콤 캘러허 박사는 광우병을 설명하기 위해 1955년의 파퓨아뉴기니의 식인풍습에서 부터 미국의 가축 도살 실태, 그리고 2004년의 광우병 연구 결과까지는 톱니바퀴 맞추 듯 맞추어 나간다.
마치 거대한 미스테리를 하나 하나씩 풀어내듯 나열되는 각각의 사건들을 일관성 있게 연결고리를 맞춤으로써 광우병에 대한 의문을 조금이라도 해소해 보려고 노력한다. 때로는 그 연결고리들이 너무나 잘 들어맞아 내가 지금 음모이론을 다루고 있는 소설을 읽고 있는 것이 아닌가 착각할 정도이다. 하지만 슬픈 현실은 이것은 엄연한 논픽션 . 사실이라는 점이다.

광우병 - 알려진 것 보다 무서운 병

"소해면상뇌증bovine spongiform encephalopathy(BSE)이라고 불리는 광우병은 일단 발생하면 급속하게 악화되어 죽음에 이르는 치명적인 병이다. 최근 프라이온prion이라는 단백질이 전염인자로 밝혀졌는데, 프라이온은 바이러스도 아니고 박테리아도 아니다. 이것은 독특한 전염성을 가진 단백질로, 10억이나 되는 뇌세포가 서서히 죽어가도록 유도한다. 뇌세포가 죽은 자리에는 구멍이 나고 어그러진 흠집들이 뇌에 남게 된다. BSE에 걸린 소의 뇌를 현미경으로 보면 뇌세포가 죽은 자리에 마치 스펀지의 단면과 같이 구멍이 숭숭 나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BSE에 걸린 소는 일반적으로 감염된 후 몇 년이 지나서야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몸을 비틀거리며 이상하게 행동하기 시작한다. 몸을 부르르 떨며 자주 넘어지는 것이 대표적인 증상이고, 공격적인 성격으로 변한다. 그래서 광우병이라는 이름이 붙게 된 것이다. 현재까지 치료방법은 없다. " (본문1장  처참하게 살해된 소, 그러나 어떤 흔적도 없다.)
광우병은 역시 무서운 병이었다.
사람에게 전염되는 문제는 별개로 하더라도 소 자체에게도 무서운 재앙이었다.
치료방법이 없는 질병이라는 것은 사람 뿐만이 아니고 가축-소에게도 엄청난 재앙인 것이다.

그동안 알지 못했던 새로운 사실들.

책을 보면서 그동안 신문이나 TV에서 접해보지 못한 놀라운 사실들도 알게 되었다.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뼛조각과 관련해서, 프라이온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척수와 뼈 외에 ‘비장과 근육’에서도 발견된다고 한다. 이는 살코기는 안전하다는 미국 측의 주장을 완전히 뒤엎는 놀라운 사실이다. 또한 프라이온은 수혈이나 외과 수술도구를 통해서도 전염될 수 있다고 밝히고 있다. 뿐만 아니라 2010년경에는 인간광우병이 최고점에 도달할 수 있다는 가설과 함께, 닭과 돼지들도 결코 안전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더욱이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것은, 치매 혹은 알츠하이머질병이 사실은 인간광우병일 수 있다는 과학적인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 책의 원서에는 ‘한국’이란 단어가 등장하는데, 한국으로 수출되어 ‘전통 의약과 영양보충제’로 사용되어온 엘크의 뿔이, 광록병에 걸린 엘크의 것일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우리가 광우병 하면 소만을 생각 하고 있었는데 사슴 종류에도 광우병과 유사한 광록병이 있었던 것이다.

알츠하이머병 환자의 5~13%가 사실은 변종 CJD(인간에게 나타나는 광우병)일 수 있다!

"1979년에는 알츠하이머병이 약 10만 명 중 한 명 이하의 사람이 알츠하이머병으로 죽었을 정도로 희귀병이었다. 1979년 미국질병관리본부의 공식 통계에 의하면, 미국에서 653명의 사람이 알츠하이머병으로 사망했다. 그러나 2002년엔 58,785명이 알츠하이머병으로 죽음에 이르렀다. 다시 말하면, 24년 동안 미국에서 알츠하이머병으로 사망한 환자의 수가 8,902% 증가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일대학과 피츠버그대학에서 각각 진행한 실험결과는 놀라운 사실을 말해준다. 알츠하이머병으로 죽은 환자의 사후부검을 실시한 결과, 5~13%가 CJD로 판명된 것이다. 2003년 로라 마누엘리디스의 말을 빌면, “퇴행성 뇌질환과 알츠하이머병은 정확한 진단이 어려운 노인 정신질환의 진단명으로 잘못 이용되고 있”으며, CJD 전염병이 알츠하이머병으로 오진되었기 때문에 북미에서의 CJD 전파가 은폐되어왔다는 것이었다. "
(본문 12장 속임수 은폐, 그리고 두려움)
새로운 충격이었다. 그 동안 일부 과학자들이 제기한 알츠하이머(치매) 와 광우병의 연관관계를 이 책에서는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그 연관성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다. 물론 아직 까지 연구의 미비로 명확한 것은 아니지만 만일 이 주장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벌써 광우병의 시대에 살고있는 셈이며 정말로 소름끼치는 공포가 아닐 수 없다.

아직 늦지 않았다.

책의 저자는 광우병에 대한 대처가 아직은  늦지 않았으며 (정확히는 포기할 단계가 아니라는 점) 그 해결책으로 7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동물사료를 금하고 지금까지의 임상사례를 모두 공개하며 개방된 자세로 이 질병을 연구한다면 인류가 충분히 극복 할 수 있으리라고 애기하고 있다.
대부분의 공포는 대상에 대한 무지- 즉 알지 못함에서 오는 경우가 많다. 광우병에 대해 우리가 알면 알수록 그 공포는 줄어들 것이며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의 메세지가 책의 마지막에 담겨져 있었다.






Posted on 2008.05.20 13:44
Filed Under 역사 이야기

 2008년 5월 20일 (화)
▲국내외 주요사건
325년 =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 최초의 기독교 종교회의인 제1차 니케아 공의회 소집
1874년 = 미국 의류업자 리바이 스트로스, 구리 리벳이 박힌 청바지 첫 시판
1875년 = 길이.질량.부피 등의 국제적 표준 통일위한 미터법 파리서 조인
1882년 = 이탈리아, 독일-오스트리아 양국 동맹에 가담 3국동맹 결성
1902년 = 쿠바, 미국지배 벗어나 공화국으로 독립
1920년 = 멕시코 초대 대통령 베누스티아노 카란사, 군사반란으로 부하에게 피살
1926년 = 한용운의 시집 '님의 침묵' 출간
1927년 = 미국 비행가 찰스 린드버그, 뉴욕-파리 대서양횡단 논스톱 단독비행에 성공
1949년 = 남로당 국회 프락치 사건으로 김약수(金若水).이문원(李文源) 의원 등 구속. 미국무부, 주한미군 철수계획 발표
1954년 = 제 3대 국회의원(민의원) 선거
1961년 = 장도영(張都暎), 내각수반에 취임
1962년 = 정부, 야간통행금지 부활
1978년 = 일본 나리타(成田) 공항 개항
1980년 = 신현확(申鉉碻) 총리 내각, 대규모 반정부 소요사태에 대한 책임으로 총사퇴. 대법원, 김재규(金載圭) 중앙정보부장 등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 관련자 5명 사형 확정
1982년 = 영국군, 포클랜드섬 상륙작전 개시
1986년 = 서울대 이동수군 분신자살
1989년 = 자오쯔양(趙紫陽) 중국 총서기 실각
1990년 = 루마니아, 첫 자유총선거 실시
2002년 = 동티모르, 신생독립국으로 출범
2003년 = 대북비밀송금 의혹 관련 이근영 전 금융감독위원장 긴급체포

"님은 갔습니다."

중고등학교 시절 , 교과서에 나오는 시들을 무조건 외워야 하는 시기가 있었다. 시험을 위해서...
시속에 숨어있는 뜻도 모른고 서정시,서사시,은유법,비유법,청록파 등등...무수히 외웠던 많은 지식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어이없는 짓이었다. 시를 쓴 사람의 마음도 이해 못하면서 어떻게 시를 감상할 수 있을까.
하지만 무작정 외워던 그 많은 시들 중에도 어린 마음이지만 가슴이 울컥하거나 눈시울이 붉어지는 그런 시들도 있었다. 그런 감정이 하나 둘 생기면서 좋아하는 시인도 생기게 되고 교과서에는 나오지 않지만 그 들의 시를 일부러 헌책방에서 구입해 읽는 정성을 보이기도 했었다.
윤동주, 한용운 .
내가 학창시절에 가장 좋아했던 시인이다.
굳이 국어방법론적으로 분류하자면 둘다 여성취향적 문체를 가진 시인이다.
하지만 그런 분류 필요없이 난 그들의 시체가 좋았다. 순응과 절제와 조용한 외침들, 그런것들이 좋았다.
5월 20일은 만해 한용운의 [님의침묵] 시집이 발간된지 82주년이 되는 날이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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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의 침묵 시비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적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님의 침묵 - 전문 >

시 [님의 침묵]에 대한 설명은 굳이 하고 싶지 않다. 내가 말함으로써 읽는 이에게 선입견이 될 것이고 그것이 이 시를 올바르게 감상하는데 방해가 될 테니까. 시의 배경이 무엇이며, 이시의 님은 누구이며 , 작가의 사상은 무엇이며 이런 것들은 시를 감상하는 데 하등의 도움이 되지 못한다. 시를 분해하지 말고 시를 있는 그대로 한번 감상해 보자.

<만해 한용운 연표>
1879 충남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에서 부 韓應俊의 차남으로 출생, 속명은 貞玉, 법명은 용운, 법호는 만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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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 ~1897 향리에서 한학 수학 
1892 천안 전씨와 결혼 
1899 강원도 설악산의 백담사 등지를 전전 
1904 귀향하여 향리에서 수개월간 머물다 
1905 백담사 김연곡 스님에게서 득도. 김영제 스님에 의하여 수계. 이후 이학암 스님으로부터 <기신론>, <능업경>, <원각경> 등을 사사받음 
1908 4월경 일본으로 건너가 下關 등지를 순유하고 동경의 曹洞宗 대학에서 불교와 서양철학을 청강함. 10월경 귀국 
1910 <조선불교유신론> 탈고 (1913년 불교서관에서 간행) 
1912 불교경전 대중화의 일환으로 <불교대전>을 편찬하기 위해 양산 통도사의 고려 대장경을 열람함 
1913 불교강연회 총재에 취임. 박한영 등과 함께 불교 종무원을 창설. 통도사 불교강사에 취임. <불교대전>을 국한문으로 편찬(1914, 홍법원) 
1918 월간 교양지 <惟心>을 발간하여 편집인 겸 발행인이 됨 
1919 1월경 최린, 현상윤 등과 조선독립에 대해 의논함. 최남선이 작성한 <독립선언서>의 자구 수정을 하였으며 <공약 3장>을 추가함. 3월 1일 명월관 지점에서 33인을 대표하여 독립선언 연설을 하고 투옥됨. 7월 10일 <조선독립의 개요> 제출 
1926 시집 <님의 침묵>을 회동서관에서 발행하다 
1927 신간회 중앙집행위원 겸 서울지부장에 피선됨 
1931 김법린, 최범술 등이 조직한 승려비밀결사인 卍黨의 영수로 추대됨 
1933 유숙원과 재혼. 벽산 스님, 방응모, 박광 등의 도움으로 성북동에 尋牛莊을 짓다. 여기에서 소설 <흑풍>, <죽음> 등을 조선일보에 연재하다. 
1944 6월 29일 심우장에서 이적. 미아리에서 화장하여 망우리 공동묘지에 묻히다 

만해 한용운을 이야기 할 때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독립운동가,승려,시인.
그에 독특한 인생경로도 사람들의 많은 호기심을 일으키지만 무었보다도 그는 자신의 소신을 항상 굽히지 않고 이야기 할 수 있었던 , 그 당시로는 정말 몇 안되는 절개를 지닌 사람이었다.
선생의 이러한 정신은 다음과 같은 일화에도 잘 나타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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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홍성의 만해선생 생가


일본이 통치하는 동안 그들은 처음엔 민적(民籍), 그 후엔 호적법(戶籍法)을 실시했다.
선생은 처음부터 "나는 조선 사람이다. 왜놈이 통치하는 호적에 내 이름을 올릴 수 없다."고 하며, 시집 《님의 침묵》에도 '나는 민적이 없어요'라는 구절이 있듯이 평생을 호적 없이 지냈다. 그래서 선생이 받는 곤란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신변 보호를 받을 수 없었던 것은 물론, 모든 배급 제도(쌀 고무신 등)에서도 제외되었다.
그보다도 큰 문제는 선생이 귀여워하던 외딸 영숙이가 학교를 다닐 수 없었던 점이었다. 아버지가 호적이 없으니 자식 또한 호적이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선생은 돌아가시는 날까지 "일본놈의 백성이 되기는 죽어도 싫다. 왜놈의 학교에도 절대 보내지 않겠다."하고는 집에서 손수 어린 딸에게 공부를 가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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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담사 만해 기념관


최근 일본에서는 2012년 부터 사용하는 중학교 교과서에 독도가 일본 영토임을 표기하는 내용을 담겠다고 합니다. 마치무라 노부타카 일본 관방장관은 "다케시마가 일본 영토라는 정부의 일관된 주장에는 변함이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얼마전에는 인터넷에 이명박 대통령이 독도를 포기했다라는 유언비어가 돌기도 했습니다.
오늘같은 세태에 한용운 선생과 같이 올곧은 분이 있었더라면 우리들 모두에게 힘이 되지 않았을까. 그리고 일본의 관리들이 저렇게 망언을 늘어놓지는 못했을 거라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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