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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on 2008.11.05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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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을 가지다.

미국의 대통령 선거에서 오바마의 승리가 거의 굳혀져 가고 있다. 언론매체에 따른 버락 오바마 민주당 후보가 대통령이 되는 것은 기정사실화 된 듯 하다.
이대로 선거가 끝난다면 오바마는 미국 역사상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되는 것이다. 미국 사회에서 흑인의 역사는 모두가 난과 투쟁의 역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제 최초의 흑인 대통령을 가지게 된 미국이 오랜 문제점이었던 흑백갈등, 나아가 인종화합의 장을 열어갈지 자뭇 궁금하다.

1502년 최초의 아프리카 흑인 노예들이 히스파니올라 호를 타고 미국 대륙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1619년 20여명의 흑인이 버지니아의 제임스타운에 상륙했다.  그 후 250여년 동안 미국에 도착할 때까지 항해에서 살아남은 1400만명의 아프리카 흑인 노예들은 북미와 남미의 밭에서 강제노동에 혹사 당했다. 미국에서의 흑인의 역사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1790년 미국이 처음 인구센서스를 실시할 당시 전체 인구 390만명 중 노예는 69만명이었으며 대다수가 그들의 후손인 오늘날 미국 흑인수는 전체 인구의 12%인 2천9백여만명이다. 

링컨 대통령과 함께한 정치 참여 시도

1865년에 끝난 남북전쟁에서 북부가 승리함으로써 링컨 대통령의 노예해방은 탄력을 받게 되고 이로 부터 흑인의 인권

운동과 정치참여가 시작 되었다. 남북전쟁 이후부터 1877년까지 미 일부 남부 주에서 흑인들은 중요한 역할을 맡아 수백 명이 지역 및 주 정부에 참여했고 상원의원 2명 등 16명이 의회에 진출했다. 흑인 출신 첫 상원의원은 1870년 미시시피주에서 당선된 히람 레블스. 특이한 것은 레블스를 포함해 당시 흑인 의원들 모두 공화당 소속이었다는 점이다.

1870~1901년 남부 루이지애나와 미시시피, 앨라배마, 조지아, 플로리다주 등 8개 주에서 1명 이상의 흑인 의원이 배출됐다. 반발도 적지 않았다.1866년 테네시주에선 백인우월주의 복원을 꿈꾸는 'KKK단'이 조직됐다. 또 1877년 연방정부가 남부에서 군대를 철수하는 등 흑인들의 시민권 보호 노력을 중단했다. 이후 민주당이 의회를 장악, 흑인에 대한 투표권 법안을 통과시키며 1920년대 말까지 흑인 정치참여는 크게 위축됐다.


1902~1928년 의회에는 흑인 의원이 단 1명도 자리를 차지하지 못할 정도였다. 암흑기를 깬 사람은 1928년 일리노이주 시카고에서 하원의원에 당선된 오스카 데프리스트(공화)였다. 이어 1930년대 민주당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흑인 정치사에 큰 변화가 생겼다. 지난 70여 년간 공화당 지지 우세던 흑인 사회가 루스벨트 대통령의 뉴딜정책에 영향받아 민주당 지지로 '권력이동'된 것이다. 이후 흑인들은 공화당보다 민주당의 주요 지지기반이 됐다.

그리고 1955년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운동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흑인 인권 운동이 시작되었다.

"나에겐 꿈이 있습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

1963년 마틴루터 킹 목사는 I have a dream 이라는 유명한 연설로 미국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다.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Jr)은 미국의 흑인 인권을 신장시키려고 노력한 대표적인 운동가로 알려져 있다.
그는 "비폭력 저항 운동"이라는 구호 아래 
흑인과 백인이 같이 어울려서 같이 살자는 운동을 펼쳤다.

그는 침례교회 목사였으며 1955년 12월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투쟁' 지도하였고 1957년 남부 그리스도교도 지도회의(SCLC) 결성하였다. 
1963년 8월 28일 킹 목사와 25만 명 의 흑인 인권운동자 들은 워싱턴으로 행진을 시작한다.행진의 슬로건은 '직장과 자유를 위한 행진' 이었고 링컨 기념관에 도착한 킹 목사는 'I have dream' 이란 제목의 명 연설을 했다.

'나는 언제고 이 나라가 일어나서 이 나라가 표방하고있는 신조의 진정한 의미를 실현하리라는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신조란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것입니다...나는 꿈이 있습니다. 언제고 우리의 자녀들이 백인 자녀들과 같이 버스를 타고 학교에 가는 것입니다.나는 꿈이 있습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벽인 자녀들과 같이 식당에서 잡담을 나누며 ...                                                                                      <마틴 루터 킹 "I have dream"  中> 


이 연설은 인권투쟁의 있어서 킹 목사의 영향력을 절정에 이루게 했고 이듬해 그는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다. 1968년 4월 흑인 청소부의 파업을 지원하다가 암살당했다.

마틴 루터 킹 목사는 1964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기로 했으며 여전히 미국 흑인 사회에서 존경 받는 인물 중에 하나로 칭송 받고 있다. 미국인들은  그를 기리기 위해 그의 생일(1월 15일)에 가까운 매년 1월 세번째 토요일을 마틴 루서 킹 2세의 날로 정하고 휴일로 지정하고 있다.

버스타기를 거부한 로자 파크스
마틴루터 킹 목사의 일생을 이야기 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결정적인 사건이 있다. 바로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운동이다

 
1955년 12월 1일, 앨라배마 주 몽고메리에서 백인 승객에게 자리를 양보하라는 버스 운전사의 지시를 거부하였고, 결국 이것 때문에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 사건은 382일동안 계속된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으로 이어졌고 이 운동은 인종 분리에 저항하는 큰 규모로 번져 나아갔다. 이 때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여기에 참여하게 되고 결국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인권과 권익을 개선하고자 하는 미국 민권 운동의 시초가 되었다. 마침내 1956년 12월 미연방대법원에서는 당시 공공버스에서 흑인,백인의 자리를 구분했던 법률을 위헌이라고 판결하게 되었다.
이 사건의 주역이 바로  로자 리 루이즈 매콜리 파크스(Rosa Lee Louise McCauley Parks) 이다.

로자 파크스는 이후 여러 고초를 겪었지만 민권운동의 상징적 인물이 되었다. 백화점에서의 직장을 잃었으며 남편 또한 직장을 그만두어야 하였다. 1957년 부터는 이 사건을 알리기 위해 각지를 돌며 연설하였다. 재봉사 일을 계속하였으나 1965년에 아프리카계인 미국 하원의원인 존 콘이어가 그녀를 비서로 고용하여 디트로이트의 사무실에서 일하게 하였다. 그녀는 1988년에 은퇴할 때까지 이 일을 계속하였다.


"흑인에게도 투표권을 달라"  아멜리아 로빈슨
 흑인인권운동에서 또 한가지 기념비적인 사건은 바로 셀마 몽고메리 행진이다.
셀마 몽고메리 행진은 미국 인권 운동의 정치적, 감정적 최고조기를 형성한 피의 일요일을 포함한 세 개의 행진을 가리킨다. 이 행진은 미국 앨라배마 주 셀마에서의 Amelia Boynton Robinson과 그 남편에 의해 시작된 투표권을 쟁취하고자 하는 운동의 정점이었다. 그들 부부는 마틴 루터 킹 주니어, Jim Bevel, Hosea Williams를 비롯한 많은 저명한 미국 인권 운동가들을 셀마로 불러들였다.

첫 번째의 행진은 1965년 3월 7일 "피의 일요일"에 일어났다. 이 때, 600명의 인권 행진에 참여한 사람들이 주 경찰에 의

해 몽둥이 및 최루가스 공격을 받았다. 마지막인 세번쨰의 행진만이 성공적으로 앨라배마 주 몽고메리까지 이루어질 수 있었다. 셀마-몽고메리로 이어지는 행진로는 이후 셀마 몽고메리 국립 역사로(Selma to Montgomery National Historic Trail)로 기념되고 있다. 연일 계속되는 행진에 25,000 명의 지지자들이 합세하여 의사당으로 행진을 시작하자 당시 존슨 미 대통령의 흑인투표권 법안이 통과된다.앨라배마 등 인권차별 문제가 심한 곳에는 연방에서 작성된 선거인명부로 관리되었으며 관리인이 파견되어 선거를 관리하게 된다.

 "혁명을 꿈꾸다"  말콤X

하지만 모든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운동방식에 동의 하고 있던 것은 아니다. 일부의 과격파는 흑인 이슬람 지도자인 말콤 X를 지지하며 그의 비폭력 흑인운동에 반발했는데, 왜냐면 그들에게 온건한 성격의 흑인인권운동은 백인들과의 타협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또한 대학생 때 부모님으로부터 대학교 입학선물로 자동차를 선물받을만큼 부유한 집에서 자란 루터 킹 목사의 성장환경도 그의 온건민권운동이 흑인들에게 외면받은 이유이다.

양키들을 "파란눈을 가진 악마"라고 표현 하며 흑인으로서의 독립된 주체성을 가지고 흑백분리 독립이라는 명제로 미국백인사회에 정면으로 도전한 사나이가 바로 말콤엑스(malcolm x)이다.

말콤 엑스(Malcolm x, 1925~1965)의 '엑스'라는 성은 그가 회교(Black Muslims)에 입교하면서 원래의 성을 버리고 대신 쓰기 시작한 것이다. 미국 흑인들의 성은 원래 그들 조상의 것이 아니고 이들을 노예로 부리던 옛날의 백인주인들이 멋대로 붙여주었던 것이니만큼, x자를 써서 흑인의 빼앗긴 이름을 상징한다는 것이 흑인회교도들의 입장이었다.

말콤은 알라를 믿게 되면서 철저한 행동주의자로 변신했다. 다시 책을 읽기 시작한 그는, 모르는 단어가 너무 많아 사전을 통째로 외워버렸다. 독서에 전념한 말콤은 5년간의 공부로 시력이 지독하게 나빠졌지만, 남들이 대학에서 배우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배웠다.
당시 비폭력 무저항주의를 표방한 마틴 루터 킹 목사는 대부분의 백인과 흑인으로부터 찬양과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말콤 X는 그는 타협할 줄 모르는 직선적이고 호전적인 웅변으로 냉엄한 현실을 자각한 소수의 흑인들을 제외한 모든 미국인들로부터 비난과 저주를 받았다. 말콤엑스가 흑인들에게도 환영받지 못한 이유는 그가 성공한 흑인이라 불리며, 백인들로부터 인정받는 흑인 지도자들에게도 독설을 퍼부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종교적 신념을 새롭게 하기 위해 1963년 회교 성지 메카를 순례하였고, 이듬해 '사단법인 회교사원'을 조직하고 보다 활발한 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생애의 마지막 1년 동안 말콤은 완전히 새로운 사상과 태도를 가진 지도자로 변신했고, 말콤은 곧이어 OAAU를 조직했다. 종교적 편견을 뛰어넘어 미국 흑인들의 정치, 경제, 문화적 공동체를 조직하기 위한 실질적인 준비 작업에 들어갔던 것이다.

그러나 말콤의 두 번째 변신은 갑작스런 죽음으로 그 뜻을 채 펴보지도 못 한채 종국을 고하고 말았습니다. 1965년 2월 21일 OAAU 연설회장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흑인괴한들의 집중총격을 받고 현장에서 살해된 것이다.


"백인이 흑인에게 '왜 나를 증오하는가?'라고 묻는 것은 강간범이 강간당한 이에게, 또는 늑대가 양에게 '왜 나를 증오하는가?'라고 묻는 것과 똑같다. 백인은 흑인의 증오를 비난할 도덕적 자격이 없다."   <말콤X의 어록 중>


"대통령을 향한 도전"  제시 잭슨 목사

마틴 루터 킹 목사의 후계자임을 자처하는 사람이 바로 제시 잭슨 목사이다.
제시 잭슨(Jesse Jackson) 목사는 마틴 루터 킹 목사의 후계자로 자처하며 흑인 및 소수인종, 정치범, 성희롱 문제 등에 활약하고 있는 흑인 인권운동가이다.

98년에는 미국 월가가 킹 목사를 기리는 뜻에서 그의 생일인 1월 19일휴장토록 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기도 했다. 대부분의 관공서와 기업들은이날을 공휴일로 해왔으나, 월가만은 그간 흑인 인권단체의 휴장압력을 번번이 거부해왔다.

84년, 88년 민주당 대통령후보 경선에 나섰다 실패했고, 92년에는 대선출마를 선언하는 등 현실정치에 큰 관심을 가져왔었다. 이번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버락 오바마 후보가 많은 대의원 수를 확보할 수 있었던 것도 제시 잭슨 목사의 두번에 걸친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 참여에서 그 기초가 다져진 것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잭슨 목사의 외교문제에도 여러 차례 관여해왔다. 84년 시리아를 방문, 포로로 잡혀있던 미 해군 조종사 로버트 굿맨 대위를 석방시켰다. 87년에는 쿠바로 들어가 48명의 쿠바 정치범을 석방시켰다. 90년에는 이라크를 방문, 부녀자 및 어린이의 석방을 성사시켰다. 99년엔 유고와 마케도니아 국경지역에서 유고군에 생포됐던 미군 포로 3명을 석방시키기도 했다.최근에는 버락 오바마를 지지하면서도 그가 흑인문제를 외면하고 있다고 말해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었다.

버락 오바마 민주당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 됨으로써 미국 사회는 어쩔 수 없는 (어찌보면 미국인들이 선택한) 변화를
겪게 될 것이다. 전문가들은 그 변화가 급진적이 아닌 온건적인 변화가 될 것이라고 이야기 한다.
아니 이미 흑인이 대통령이 됨으로써 미국 사회는 변화를 시작 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처럼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나오기 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흑인의 인권을 위해 넓게는 사람들의 인권을 위해 헌신해 왔으며 그 결과가 이제 서서히 우리들 눈앞에 실현되고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 라는 말이 다시 한번 생각나는 미국의 대통령 선거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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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붉은방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