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on 2009.11.17 09:16
Filed Under TV 이야기

드디어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미실이 퇴장을 했습니다.
그동안 숱한 화제를 뿌리며 인기를 누리던 미실. 심지어 드라마 제목이 <선덕여왕>이 아니라 <미실세주) 이었어야 하지 않느냐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미실 역활이 드라마 <선덕여왕>에 미친 영향은 막강 했습니다.실제로 50회에 방영되었던 미실의 최후장면은 순간 시청률이 49.9%를 기록해 그 동안의 선덕여왕 시청률 중 최고를 기록했습니다.언론에서는 온통 미실에 대한 보도 뿐이고 사람들도 미실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자~ 이런 미실이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퇴장을 했습니다.하지만 드라마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드라마 제목이 <미실세주>가 아닌 <선덕여왕>이기 때문이지요.미실이 드라마에서 퇴장한 여파는 당장 시청률에서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선덕여왕>은 17일 시청률조사기관 TNS 미디어코리아 집계 37.7%를 기록하며 전 회 42.3%보다 무려 4.6%나 하락했습니다. 이는 지난 주 미실의 죽음 직전과 죽음 당시의 9일 44.9% 10일 44.4% 이후 뚜렷한 하락세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선덕여왕>과 동시간대 방영된 KBS 2TV 월화드라마 <천하무적 이평강>은 6.2%, SBS <생활의 달인>은 5.8%를 각각 기록하며 미실이 퇴장해 다소 맥빠지기 시작한 <선덕여왕>을 서서히 압박하기 시작했습니다.물론 4~5%의 시청률 하락이 바로 사람들의 관심이 멀어졌다고 의미할 수 는 없습니다.
하지만 미실이 퇴장하면서 가져온, 어찌보면 예견된 하락세인 것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중심기둥이 빠진 <선덕여왕>의 다음 카드는 무었일까요?
<선덕여왕>작가진들은 미실이 퇴장한 이후의 드라마 전개 방향을 이렇게 애기했습니다.

< 덕만공주가 왕이 되기 위해서 미실세력과의 대결을 벌인 것이 드라마 중반부의 핵심이었다면 드라마 후반은 덕만공주가 어떤 왕의 길을 걸어가는지? 그리고 여기에 유신과 비담,춘추가 어떤 역활을 하며 돕게되는지?마지막으로는 유신과 비담,춘추가 어떤 방식으로 자신들만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 대립하는 지를 보여주는 것이 드라마 후반부의 핵심이 될 것이다.>

실제로 드라마는 미실의 최후 과정이 지난 51회에서 빠른 극 진행을 보이며 미실이 드라마에서 빠진 아쉬움을 매우기 위해서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미실 사후 난을 빠르게 진압하는 모습과 덕만의 사람들인 유신,비담,춘추에게 각자의 임무를 부여하는 장면, 그리고 덕만이 왕에 오르는 장면까지...
사람들에게 미실의 공백에 대한 서운함을 생각하지 못할 정도의 빠른 진행을 보여 주었습니다.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과정에 사람들은 어리둥절 할 수도 있었지만 미실시대와의 단절을 빠른 전개를 통한 세월의 흐름으로 처리하였습니다.
여기에 칠숙의 비장한 최후 장면을 곁들여 사람들의 감정적인 감동을 자극하는 것도 잊지 않았고요.
여기에 52회 예고에서는 나이가 든 유신,비담,덕만(?) 의 모습을 보여주며 비담과 유신이 대립하게 될 것이라는 떡밥도 잊지 않았습니다.
 
52회에서는 상장군으로서 군대를 이끌고 전장에서 연승을 거듭하는 유신(엄태웅)과 여왕 직속 감찰기관으로 사량부를 통솔하는 비담(김남길)의 새로운 대립구조가 시작되었습니다. 이에 비담의 복야회 문서 조작 등으로 인해 유신의 오른팔 월야(주상욱)까지 사령부에 끌려가 긴장감을 고조시켰지요.
덕만-미실의 대립구도를 대체할 갈등구조를 만들기 위해 비담-유신의 갈등구조를 만들었으며 이 갈등 구조의 상위에는 이를 통제하는 <선덕여왕>의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하지만 비담-유신의 갈등 구조는 이전의 덕만-미실의 갈등구조에 비하면 턱없이 초라해 보이는 구도 입니다.일단 갈등을 일으킬 수 있는 원인이 되는 모티브가 너무 모자랍니다. 덕만-미실은 신국을 두고 주인이 되기 위한 싸움을 벌였습니다.그 싸움은 목숨을 포함한 모든 것을 걸고 하는 싸움이었기에 그 토록 절박할 수 밖에 없는 갈등이었습니다.
반면 비담-유신의 갈등구조는 주인이 정해진 이후 그 아래에서 벌어지는 권력다툼으로 비춰져 약간은 긴장감이 떨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물론 제작진은 이 갈등을 그대로 발전시켜 나중에 <비담,염종의 난>으로 이어가려는 의도로 보여지지만 비담이 미실의 아들이라는 태생적 원인으로만은 이 갈등을 유지,증폭시킬 수는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그렇다면 이 갈등구도를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어떤 장치들을 사용하게 될까요?
아마도 유신,비담의 덕만에 대한 충성경쟁과 정인에 대한 연모를 가미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51회 마지막 장면에서 유신은 모든 것을 바치는 충성을 맹세했고 비담은 아낌없이 뺐는 사랑을 맹세했습니다. 이처럼 유신과 비담은 한 대상인 덕만에 대한 애정은 같으나 그 방식은 서로 다를 것이라는 사실을 유신-비담의 갈등구조를 이끌어가는 원동력으로 사용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드라마 <선덕여왕>의 종반부를 장식할 이야기는 그 제목에서도 보이듯이 바로 <선덕여왕>이야기 이어야 합니다.
우리 역사상 최초의 여왕인 <선덕여왕>이 어떻게 왕이 되었으며 어떤 왕의 길을 걸었으며 그 왕의 길을 걷기 위해 얼마나 많은 개인적 행복을 포기해야 했는 지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역사상 최초의 여왕으로, 그리고 첨성대를 지은 여왕으로 기억되고 있는 <선덕여왕>은 개인적으로는 그렇게 행복한 삶을 살지는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후사를 위해 세명의 남편을 두었으나 결국 후사가 없었고 즉위 직전에는 여왕 즉위에 반대하는 <칠숙,석품의 난>이 있었으며 말년에는 상대등인 비담의 난 와중에 죽게됩니다.
실제로 여왕은 자신의 왕위를 유지하기 위해서 많은 귀족들의 견제를 이겨야 했으며 이 때문에 많은 것을 또한 포기해야 했을 것입니다.이제 본격적으로 여왕의 시대를 연 드라가 <선덕여왕>은 고난의 길이었던 여왕의 길을 걸었던 선덕여왕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할 때 입니다.

Posted on 2009.10.13 10:12
Filed Under TV 이야기

드라마 선덕여왕이 덕만공주의 왕위계승 선언을 기점으로 그 동안의 아마츄어적 대결 구도가 드디어 왕위를 두고 벌이는 본격적인 정치 대결로 들어섰습니다. 이제 부터는 작은 사건(에피소드)에 대한 대결이 아닌 정말로 생사를 걸고 결과로 달리는 싸움이 되겠지요.
드라마를 보면서 문득 재미있는 장면을 보게 되었습니다.
미실이 덕만공주의 여자도 왕이 될 수 있다는 발언과 김춘추의 골품제는 폐지되어야 한다는 말을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생각하고 고민하는 장면 이었지요.그리고 나오는 미실의 한마디....

"새로운 시대가 오는 것인가?"


덕만공주와 김춘추의 말에 미실은 아마도 심각한 문화적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쉽게 애기하자면 세대차이를 절실하게 느낀 것입니다.수십년간 권력의 핵심에 있었으면서도 자신은 단 한번도 해보지 못한 생각들을 거침없이 쏟아 놓는 두 사람을 보면서 미실은 정신적으로 엄청난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미실을 충격에 빠지게 한 이 두가지는 과연 그 당시 신라, 미실에게 어느정도의 절대적 진리였을까요?

남자만이 왕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장자상속이라는 문화적 배경에서 나온 것입니다.
어찌보면 원시사회의 모계 중심 사회에서 부계중심 사회로 변화하면서 만들어진 문화일 것입니다.
권력의 핵심에 늘 남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여자들의 이야기는 묻혀지고 전해지지도 않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역사를 뜻하는 영어 History의 어원이 History = His + Story 역사는 그 남자의 이야기라는 말도 있습니다.미실도 이러한 가치관에 철저히 길들여져 그 많은 능력과 사람들이 있었음에도 감히 왕이 되고자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역사는 늘 발전하는 법.
우리나라 최초의 여왕이 만들어지기 전에 이웃 일본에서 이미 여왕이 왕위에 오른 적이 있습니다.
시대적으로 보아 당시 진평왕이 선덕여왕에게 왕위를 물려 줄 때 이웃나라인 일본에서의 이런 전례를 들어 귀족들의 반대를 물리쳤음 직도 합니다.
일본에서는 593년 당시 외척이었던 소가노 우마코가 당시의 일왕을 암살하고 자신의 딸인 스이코를 일본왕으로 추대합니다.하지만 모든 권력은 쇼토쿠대자가 섭정을 하게되고 스이코 왕은 꼭두각시 노릇만을 하게 됩니다.꼭두각시 왕일 지라도 이웃 일본에 여자가 왕이 되었다는 소식은 당시 교류가 많았던 신라에서도 알게 되었을 것이고 이러한 사실은 새로운 가치관을 만들수 있는 배경이 되었을 것입니다.


미실을 구속한 또하나의 진리 바로 신라의 골품제는 신라시대 혈통의 높고 낮음에 따라 신분을 구분한 제도이며 왕족을 대상으로 한 골제(骨制)와 귀족과 일반백성을 두품제(頭品制)로 구분하였습니다.
하지만
신라의 이런 골품제는 다른 시대의 신분제도와는 약간 다른 모습을 보입니다.
고려나 조선에서의 신분제는 왕으로 부터 최하위 백성까지의 모든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사회 유지 제도였으나 신라의 골품제는 주로 관직의 진출이나 지배층의 역활 분담쪽만 한정적으로 적용되었습니다.즉 지배자들을 규율하는 원칙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골품제를 정면으로 반대하고 나온 김춘추의 주장에 - 그렇다고 김춘추가 골품제의 전면 폐지를 애기한 것은 아닙니다.단지 성골이 아닌 진골도 왕이 될 수 있다라는 것만 주장한 것입니다.- 미실은 새로운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시대 즉 신세대의 시대가 오고 있음을 직감했을 것입니다.

하나의 구시대가 지나고 새로운 신시대가 오는 과도기에서 사람들은 수많은 문화적 괴리감을 느끼게 됩니다. 특히 그 구시대를 이끌어 가던 리더들은 더더욱 그런 괴리감을 많이 느끼게 됩니다.
자신들이 그동안 누렸던 기득권이 일순간 무너지는 상황이 오게되고 그 동안 진리라고 믿었던 모든 가치관들이 모두 쓰레기처럼 변해 버리는 상황에서 당혹해 하며 어쩔 줄을 모르게 되지요.

"내가 믿는 이 낡은 가치관을 붙잡고 있을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시대에 맞춰 변화할 것인가?"

지난 이야기지만 노무현 대통령의 재임시절에도 이런 세대차이의 현상이 있었습니다.
당시 야당이던 한나라당과 심지어 민주당까지 합세하여 노무현 대통령을 탄핵소추했을 때 똑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마치 20세기의 마지막이 21세기 시작의 발목을 잡는 듯한 느낌...
그들에게는 국민들과 소통하는 탈 권위주의의 대통령이 문화적 충격이었을 것입니다.그래서 어떻게든 이전의 가치관을 유지하려고 발버둥치고 싶었을 것입니다.하지만 이미 시대적 변화를 알고 이를 원하던 국민들의 심판은 냉혹했습니다.국민들은 그런 생각을 국회의원 선거에서 보여주었습니다.

역사는 승자만을 기록한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결국 이러한 시대적 변화를 이끌거나 그 시대에 맞게 변화한 사람들이 승자가 되는 것이고 역사의 기록에 남게 되는 것입니다.
어쩌면 미실은 이러한 시대적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에 역사속에서 사라졌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Posted on 2009.06.02 11:07
Filed Under 역사 이야기


최근 MBC 특별기획으로 방영되고 있는 드라마 '선덕여왕'이 20% 이상의 시청률을 기록하며 월화극의 새로운 지존으로 떠올랐다. 당초 고현정의 TV 드라마 컴백 작품으로 , 이요원,고현정,엄태웅,박예진 등의 화려한 캐스팅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 일으켰으며 드디어 드라마 시작과 동시에 대박 드라마의 조짐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또한 최근 새롭게 불고 있는 여성중심의 드라마가 이제 사극의 범위에 까지 그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고 있다.(천추태후 등..)
국사에 조금의 관심이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아는 애기지만 우리나라 역사속에는 총 3명의 여왕이 등장한다.모두 신라의 여왕들이다.선덕여왕,진덕여왕,진성여왕.....
그리고 이웃 중국과 일본도 여왕의 수는 그렇게 많지 않은 편이다.
동양에서의 남성 우월주의는 유교가 본격적인 치세의 이념을 자리잡기 시작한 때 였으며 이런 사상으로 인해 동양에서는 여왕이 만들어지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그런 상황에 유독 신라에서만 3명의 여왕이 만들어진 이유는 신라사람들이 남녀차별에 비교적 자유로왔으며 유교적 사고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여왕(女王)은 성별이 여자인 군주를 가리키는 말이다. 제국의 여자 군주는 여천황(女天皇) 또는 여황제(女皇帝)라고 부른다. 영어 'Queen'은 여왕을 가리키는 낱말이지만 또한 왕비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앞서 말했듯이 우리나라에는 신라에서만 3명의 여왕이 있다.

선덕여왕(善德女王, ?~647년, 재위: 632년~647년)은 신라의 제27대 여왕이다. 성은 김(金), 휘는 덕만(德曼)이다. 진평왕과 마야부인(摩耶夫人)의 장녀이며 태종무열왕과 의자왕의 큰이모이다. 진평왕이 아들이 없이 죽자 화백회의에서 그녀를 신라의 새 왕으로 추대하여 성조황고(聖祖皇姑)라는 호를 올렸다. 연호를 인평(仁平)이라 하였다.
즉위한 해인 632년에 관원들을 전국 곳곳에 파견하여 백성들을 진휼(賑恤)하게 하고, 633년에는 조세를 면제해주는 등 일련의 시책으로 혼란스러웠던 민심을 수습하였다.
고구려와 백제의 신라에 대한 침공이 빈번히 발생하기 시작해 나라의 존립이 위협을 받는 상황이 발생하자, 이를 막는 한편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동맹을 맺어 외교적 방어선을 구축하는 공격적인 외교술을 펼쳤다.
더불어 민생의 안정에 주력하여 가난한 이들을 보살피도록 하는 구휼정책을 활발히 추진하였으며, 첨성대를 건립하여 농사에 도움이 되게 하였다. 그녀가 백성들을 얼마나 인자하게 아끼고 사랑했는지는 지귀(志鬼)의 설화에서도 알 수 있다. 당시 선덕여왕을 흠모하는 백성들이 많았는데 지귀는 그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선덕여왕이 영묘사를 행차할 때 그녀를 만나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가 깜빡 잠이 들었는데, 선덕여왕이 이를 보고 그의 가슴 위에 자신의 팔찌를 놓고 떠났다. 지귀가 잠이 깨어 이를 알고는 마음에서 불이 나 영묘사(靈廟寺)를 건립하였다고 한다.
또한 불교 또한 널리 장려하여 분황사, 영묘사 등 절을 많이 건립하고 불경을 연구시켜 불교의 일대 부흥을 가져왔다. 특히 선덕여왕은 웅대한 호국의 의지가 담긴 거대한 황룡사 9층 목탑을 세웠다. 황룡사 9층 목탑은 높이 80m의 거대한 탑으로 이를 모두 9층으로 한 뜻은 이웃의 9적을 물리쳐서 복속시키기 위해 나라 이름을 새겨넣은 것이다.
647년 상대등 비담(毗曇) 등 진골 귀족들이 여왕이 정치를 잘못한다는 구실로 반란을 일으키자 김춘추와 김유신으로 하여금 진압하게 하였다. 반란이 진압된 이후 얼마 안되어 승하하였다.
선덕여왕은 평소에 자신을 도리천, 곧 낭산 남쪽에 장사지내라고 하였는데 훗날 왕릉 아래에 사천왕사가 세워지게 되었다. 불교에서는 인간 세상의 한가운데에 수미산이 있고 그 위에 6천이 있는데 중턱에는 사천왕천, 꼭대기에는 도리천이 있다고 한다. 신라가 곧 불국토라는 관념에 비추어보면 선덕여왕은 승하 후 도리천에 승천하여 곧 신과 같은 존재가 된 것이다.
한때 남편이 없는 독신자라는 설이 확산되었으나 근거는 없다. 기록에 의하면 선덕여왕은 신라의 규례에 따라 세명의 남편을 뒀다. 그러나 후사를 얻는 데는 실패하였다.

진덕여왕(眞德女王, ?~654년, 재위: 647년~654년)은 신라의 제28대 여왕이다. 성은 김(金), 휘는 승만(勝曼)이다. 진평왕의 동생인 국반갈문왕(國飯葛文王)과 월명부인(月明夫人)의 딸이다.
자태가 풍만하고 아름다웠으며 키는 7척이었고 팔이 무척 길어 쭉 뻗으면 무릎까지 닿았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신체적 특징은 부처의 모습을 갖춘 보살에 비유되었을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647년 사촌언니인 선덕여왕이 비담의 난을 토벌하던 도중에 서거하자 왕위를 계승하여 즉위하였다. 연호를 태화(太和)라 하였다.
진덕여왕은 김춘추와 김유신의 보좌에 힘입어 즉위한 지 9일 만에 비담의 난을 종식시켰다. 비담을 비롯한 반란군은 김유신의 뛰어난 전술에 밀려 결국 궤멸되었다. 반란군을 토벌한 진덕여왕은 알천을 상대등에 임명하고 대아찬 수승을 우두주(牛頭州)의 영주로 임명하는 등 왕권 강화를 통한 정치적 정치적 개혁을 실시함과 동시에 국내 안정을 꾀하여 비교적 안정된 위치에서 정무를 집행하였다.
그러나 백제가 신라가 내분으로 내정이 불안한 틈을 타 그해 음력 10월 신라를 침공하였다. 이에 진덕여왕은 김유신을 출전시켜 백제군에 대적하도록 하였다. 이렇듯 백제의 지속적인 공략에 밀려 고전을 면치 못하던 신라는 설상가상으로 고구려까지 신라 공격에 가세하자 진퇴양난의 신세가 되었다. 그래서 648년에 고구려와 백제를 견제하기 위해 필요한 군사 지원을 얻기 위해 김춘추를 당나라에 사신으로 파견하였다. 당나라 역시 고구려 정벌을 위해서는 신라의 협조가 절실하게 필요했기 때문에 이를 환영하였다. 진덕여왕과 당 태종은 서로 간에 친교를 돈독히 한 다음, 나당 연합을 체결하였다.
진덕여왕은 그 후 김유신으로 하여금 국방력을 증강시켜서 훗날 삼국 통일의 기틀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진성여왕(眞聖女王, ?~897년)은 신라의 제51대 여왕(재위 887년~897년)이다. 성은 김, 휘는 만(曼) 또는 원(垣)이다. 경문왕과 문의왕후 김씨의 딸이자 헌강왕과 정강왕의 여동생이다.
진성여왕은 경문왕과 문의왕후의 소생이다. 정강왕이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서거하자 정강왕의 유언에 따라 887년 음력 7월에 왕위를 이어받아 즉위하였다. 소행이 좋지 못하고 음란하기 그지없었던 진성여왕은 색욕에 빠져 수많은 미소년들을 징집하여 처소로 불러들인 뒤 음사를 즐기는 데에만 주력하여 나랏일을 제대로 돌보려 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여왕과 관계를 맺은 정부들과 여왕에게 아첨하는 간신들의 무리가 나라의 권력을 장악하여 상벌이 함부로 행해지고, 뇌물이 난무하고, 관직을 매수하는 등 조정의 기강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렇듯 왕실과 조정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자 자연스레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해가는 데다가 여왕의 심한 낭비로 국고가 텅텅 비어 각 지방의 호족들을 닦달하여 세금 납세를 독촉하였다. 그러자 민심은 점차 흉흉해져 여기저기서 민란과 도적이 숱하게 일어나게 되었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지방의 호족들은 각자 독자적 세력을 키우는 데 전념하였다. 조정에서는 그들을 도적이라고 부르며 군대를 파견해 진압을 하려 했으나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 그 뒤로 조정의 힘은 겨우 수도인 서라벌 주변에 한정될 정도로 급격히 쇠락해갔으며, 지방 호족들은 서로 간에 힘겨루기 양상을 보였다. 치열한 싸움 끝에 살아남은 견훤과 궁예가 각자 나라를 세우자 후삼국 시대의 서막이 열렸다.
이렇듯 나라가 분열해가자 894년 진성여왕은 최치원을 아찬으로 임명하여 그의 조언에 따라 조정을 일신하고자 안간힘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던 도중 894년 음력 6월, 병마에 시달리던 진성여왕은 헌강왕의 손자인 요를 왕태자로 삼아 왕위를 물려주었다. 그러고는 그해 음력 12월에 승하하였다.

중국의 여황제
중국 역사상 여황제는 딱 한명만이 존재한다.
측천무후(則天武后, 624년: 무덕(武德) 7년 1월 23일 ~ 705년: 장안(長安) 5년 11월 2일)는 당나라 고종 이치의 황후이며 중국 역사상 최초이자 유일무이한 여황제이다. 중국에서는 그녀를 무측천(중국어: 武則天)이라 부르기도 한다. 음탕하고 간악한 요녀(妖女)라는 비난과 나라를 훌륭히 다스린 명군이라는 칭송을 같이 받고 있다. 이름은 조(照)이고, 아명은 미랑(媚娘)이다. 황제로 즉위하자 자신의 이름을 조(曌)로 바꾸었다.

일본의 여왕들
일본의 비교적 여황제가 많은 편이다.

스이코 천황(여천황)
고교쿠 천황(여천황)
지토 천황(여천황)
겐메이 천황(여천황)
겐쇼 천황(여천황)
고켄 천황(여천황)
메이쇼 천황(여천황)
고사쿠라마치 천황(여천황)  역사상 이렇게 총 8명의 여왕이 존해한다. 물론 이 중에는 가상의 인물도 존재한다는 논란이 오늘날 까지 진행되고 있다. 일본에 이렇게 여왕이 많았던 이유는 일본에서는 천황을 신으로 여겼기 때문에 그 성별에 크게 구애를 받지 않았다. 즉 일본의 신앙에서 신은 남신과 여신으로 되어 있으며 천황도 따라서 남자와 여자가 구분없이 인정될 수 있는 사회 분위기 였다는 것이다.

유럽의 여왕들

 <영국>
잉글랜드의 메리 1세(재위 1553년~1558년)
엘리자베스 1세(재위 1558년~1603년)
잉글랜드의 메리 2세(재위 1689년~1694년)
앤여왕(재위 1694년~1702년)
빅토리아 여왕(재위 1837년~1901년)
엘리자베스 2세(재위 1956년~현재)

 <네덜란드>
빌헬미나 여왕(재위 1890년~1948년)
율리아나 여왕(재위 1948년~1980년)
베아트릭스 여왕(재위 1980년~현재)

 <에스파냐>
이사벨 1세(재위 1474년~1504년)
이사벨 2세(재위 1833년~1868년)

 <포르투갈>
마리아 1세(재위 1777년~1816년)
마리아 2세(재위 1826년~1853년)

 <러시아>
예카테리나 1세(재위 1725년~1727년)
안나 1세(재위 1730년~1740년)
옐리자베타 1세(재위 1741년~1762년)
예카테리나 2세(재위 1762년~1796년

 <폴란드>
야드비가여왕(재위 1382년~1399년)
안나여왕(재위 1574년~1586년)

 <덴마크>
마르그레테 1세(재위 1387년~1412년)
마르그레테 2세(재위 1972년~현재)

 <스웨덴>
크리스티나 여왕(재위 1632년~1654년)
울리카 엘레오노라여왕(재위 1718년~1719년)

 <오스트리아>
마리아 테레지아 1세(재위 1740년~178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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