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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on 2009.06.02 11:07
Filed Under 역사 이야기


최근 MBC 특별기획으로 방영되고 있는 드라마 '선덕여왕'이 20% 이상의 시청률을 기록하며 월화극의 새로운 지존으로 떠올랐다. 당초 고현정의 TV 드라마 컴백 작품으로 , 이요원,고현정,엄태웅,박예진 등의 화려한 캐스팅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 일으켰으며 드디어 드라마 시작과 동시에 대박 드라마의 조짐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또한 최근 새롭게 불고 있는 여성중심의 드라마가 이제 사극의 범위에 까지 그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고 있다.(천추태후 등..)
국사에 조금의 관심이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아는 애기지만 우리나라 역사속에는 총 3명의 여왕이 등장한다.모두 신라의 여왕들이다.선덕여왕,진덕여왕,진성여왕.....
그리고 이웃 중국과 일본도 여왕의 수는 그렇게 많지 않은 편이다.
동양에서의 남성 우월주의는 유교가 본격적인 치세의 이념을 자리잡기 시작한 때 였으며 이런 사상으로 인해 동양에서는 여왕이 만들어지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그런 상황에 유독 신라에서만 3명의 여왕이 만들어진 이유는 신라사람들이 남녀차별에 비교적 자유로왔으며 유교적 사고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여왕(女王)은 성별이 여자인 군주를 가리키는 말이다. 제국의 여자 군주는 여천황(女天皇) 또는 여황제(女皇帝)라고 부른다. 영어 'Queen'은 여왕을 가리키는 낱말이지만 또한 왕비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앞서 말했듯이 우리나라에는 신라에서만 3명의 여왕이 있다.

선덕여왕(善德女王, ?~647년, 재위: 632년~647년)은 신라의 제27대 여왕이다. 성은 김(金), 휘는 덕만(德曼)이다. 진평왕과 마야부인(摩耶夫人)의 장녀이며 태종무열왕과 의자왕의 큰이모이다. 진평왕이 아들이 없이 죽자 화백회의에서 그녀를 신라의 새 왕으로 추대하여 성조황고(聖祖皇姑)라는 호를 올렸다. 연호를 인평(仁平)이라 하였다.
즉위한 해인 632년에 관원들을 전국 곳곳에 파견하여 백성들을 진휼(賑恤)하게 하고, 633년에는 조세를 면제해주는 등 일련의 시책으로 혼란스러웠던 민심을 수습하였다.
고구려와 백제의 신라에 대한 침공이 빈번히 발생하기 시작해 나라의 존립이 위협을 받는 상황이 발생하자, 이를 막는 한편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동맹을 맺어 외교적 방어선을 구축하는 공격적인 외교술을 펼쳤다.
더불어 민생의 안정에 주력하여 가난한 이들을 보살피도록 하는 구휼정책을 활발히 추진하였으며, 첨성대를 건립하여 농사에 도움이 되게 하였다. 그녀가 백성들을 얼마나 인자하게 아끼고 사랑했는지는 지귀(志鬼)의 설화에서도 알 수 있다. 당시 선덕여왕을 흠모하는 백성들이 많았는데 지귀는 그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선덕여왕이 영묘사를 행차할 때 그녀를 만나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가 깜빡 잠이 들었는데, 선덕여왕이 이를 보고 그의 가슴 위에 자신의 팔찌를 놓고 떠났다. 지귀가 잠이 깨어 이를 알고는 마음에서 불이 나 영묘사(靈廟寺)를 건립하였다고 한다.
또한 불교 또한 널리 장려하여 분황사, 영묘사 등 절을 많이 건립하고 불경을 연구시켜 불교의 일대 부흥을 가져왔다. 특히 선덕여왕은 웅대한 호국의 의지가 담긴 거대한 황룡사 9층 목탑을 세웠다. 황룡사 9층 목탑은 높이 80m의 거대한 탑으로 이를 모두 9층으로 한 뜻은 이웃의 9적을 물리쳐서 복속시키기 위해 나라 이름을 새겨넣은 것이다.
647년 상대등 비담(毗曇) 등 진골 귀족들이 여왕이 정치를 잘못한다는 구실로 반란을 일으키자 김춘추와 김유신으로 하여금 진압하게 하였다. 반란이 진압된 이후 얼마 안되어 승하하였다.
선덕여왕은 평소에 자신을 도리천, 곧 낭산 남쪽에 장사지내라고 하였는데 훗날 왕릉 아래에 사천왕사가 세워지게 되었다. 불교에서는 인간 세상의 한가운데에 수미산이 있고 그 위에 6천이 있는데 중턱에는 사천왕천, 꼭대기에는 도리천이 있다고 한다. 신라가 곧 불국토라는 관념에 비추어보면 선덕여왕은 승하 후 도리천에 승천하여 곧 신과 같은 존재가 된 것이다.
한때 남편이 없는 독신자라는 설이 확산되었으나 근거는 없다. 기록에 의하면 선덕여왕은 신라의 규례에 따라 세명의 남편을 뒀다. 그러나 후사를 얻는 데는 실패하였다.

진덕여왕(眞德女王, ?~654년, 재위: 647년~654년)은 신라의 제28대 여왕이다. 성은 김(金), 휘는 승만(勝曼)이다. 진평왕의 동생인 국반갈문왕(國飯葛文王)과 월명부인(月明夫人)의 딸이다.
자태가 풍만하고 아름다웠으며 키는 7척이었고 팔이 무척 길어 쭉 뻗으면 무릎까지 닿았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신체적 특징은 부처의 모습을 갖춘 보살에 비유되었을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647년 사촌언니인 선덕여왕이 비담의 난을 토벌하던 도중에 서거하자 왕위를 계승하여 즉위하였다. 연호를 태화(太和)라 하였다.
진덕여왕은 김춘추와 김유신의 보좌에 힘입어 즉위한 지 9일 만에 비담의 난을 종식시켰다. 비담을 비롯한 반란군은 김유신의 뛰어난 전술에 밀려 결국 궤멸되었다. 반란군을 토벌한 진덕여왕은 알천을 상대등에 임명하고 대아찬 수승을 우두주(牛頭州)의 영주로 임명하는 등 왕권 강화를 통한 정치적 정치적 개혁을 실시함과 동시에 국내 안정을 꾀하여 비교적 안정된 위치에서 정무를 집행하였다.
그러나 백제가 신라가 내분으로 내정이 불안한 틈을 타 그해 음력 10월 신라를 침공하였다. 이에 진덕여왕은 김유신을 출전시켜 백제군에 대적하도록 하였다. 이렇듯 백제의 지속적인 공략에 밀려 고전을 면치 못하던 신라는 설상가상으로 고구려까지 신라 공격에 가세하자 진퇴양난의 신세가 되었다. 그래서 648년에 고구려와 백제를 견제하기 위해 필요한 군사 지원을 얻기 위해 김춘추를 당나라에 사신으로 파견하였다. 당나라 역시 고구려 정벌을 위해서는 신라의 협조가 절실하게 필요했기 때문에 이를 환영하였다. 진덕여왕과 당 태종은 서로 간에 친교를 돈독히 한 다음, 나당 연합을 체결하였다.
진덕여왕은 그 후 김유신으로 하여금 국방력을 증강시켜서 훗날 삼국 통일의 기틀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진성여왕(眞聖女王, ?~897년)은 신라의 제51대 여왕(재위 887년~897년)이다. 성은 김, 휘는 만(曼) 또는 원(垣)이다. 경문왕과 문의왕후 김씨의 딸이자 헌강왕과 정강왕의 여동생이다.
진성여왕은 경문왕과 문의왕후의 소생이다. 정강왕이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서거하자 정강왕의 유언에 따라 887년 음력 7월에 왕위를 이어받아 즉위하였다. 소행이 좋지 못하고 음란하기 그지없었던 진성여왕은 색욕에 빠져 수많은 미소년들을 징집하여 처소로 불러들인 뒤 음사를 즐기는 데에만 주력하여 나랏일을 제대로 돌보려 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여왕과 관계를 맺은 정부들과 여왕에게 아첨하는 간신들의 무리가 나라의 권력을 장악하여 상벌이 함부로 행해지고, 뇌물이 난무하고, 관직을 매수하는 등 조정의 기강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렇듯 왕실과 조정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자 자연스레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해가는 데다가 여왕의 심한 낭비로 국고가 텅텅 비어 각 지방의 호족들을 닦달하여 세금 납세를 독촉하였다. 그러자 민심은 점차 흉흉해져 여기저기서 민란과 도적이 숱하게 일어나게 되었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지방의 호족들은 각자 독자적 세력을 키우는 데 전념하였다. 조정에서는 그들을 도적이라고 부르며 군대를 파견해 진압을 하려 했으나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 그 뒤로 조정의 힘은 겨우 수도인 서라벌 주변에 한정될 정도로 급격히 쇠락해갔으며, 지방 호족들은 서로 간에 힘겨루기 양상을 보였다. 치열한 싸움 끝에 살아남은 견훤과 궁예가 각자 나라를 세우자 후삼국 시대의 서막이 열렸다.
이렇듯 나라가 분열해가자 894년 진성여왕은 최치원을 아찬으로 임명하여 그의 조언에 따라 조정을 일신하고자 안간힘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던 도중 894년 음력 6월, 병마에 시달리던 진성여왕은 헌강왕의 손자인 요를 왕태자로 삼아 왕위를 물려주었다. 그러고는 그해 음력 12월에 승하하였다.

중국의 여황제
중국 역사상 여황제는 딱 한명만이 존재한다.
측천무후(則天武后, 624년: 무덕(武德) 7년 1월 23일 ~ 705년: 장안(長安) 5년 11월 2일)는 당나라 고종 이치의 황후이며 중국 역사상 최초이자 유일무이한 여황제이다. 중국에서는 그녀를 무측천(중국어: 武則天)이라 부르기도 한다. 음탕하고 간악한 요녀(妖女)라는 비난과 나라를 훌륭히 다스린 명군이라는 칭송을 같이 받고 있다. 이름은 조(照)이고, 아명은 미랑(媚娘)이다. 황제로 즉위하자 자신의 이름을 조(曌)로 바꾸었다.

일본의 여왕들
일본의 비교적 여황제가 많은 편이다.

스이코 천황(여천황)
고교쿠 천황(여천황)
지토 천황(여천황)
겐메이 천황(여천황)
겐쇼 천황(여천황)
고켄 천황(여천황)
메이쇼 천황(여천황)
고사쿠라마치 천황(여천황)  역사상 이렇게 총 8명의 여왕이 존해한다. 물론 이 중에는 가상의 인물도 존재한다는 논란이 오늘날 까지 진행되고 있다. 일본에 이렇게 여왕이 많았던 이유는 일본에서는 천황을 신으로 여겼기 때문에 그 성별에 크게 구애를 받지 않았다. 즉 일본의 신앙에서 신은 남신과 여신으로 되어 있으며 천황도 따라서 남자와 여자가 구분없이 인정될 수 있는 사회 분위기 였다는 것이다.

유럽의 여왕들

 <영국>
잉글랜드의 메리 1세(재위 1553년~1558년)
엘리자베스 1세(재위 1558년~1603년)
잉글랜드의 메리 2세(재위 1689년~1694년)
앤여왕(재위 1694년~1702년)
빅토리아 여왕(재위 1837년~1901년)
엘리자베스 2세(재위 1956년~현재)

 <네덜란드>
빌헬미나 여왕(재위 1890년~1948년)
율리아나 여왕(재위 1948년~1980년)
베아트릭스 여왕(재위 1980년~현재)

 <에스파냐>
이사벨 1세(재위 1474년~1504년)
이사벨 2세(재위 1833년~1868년)

 <포르투갈>
마리아 1세(재위 1777년~1816년)
마리아 2세(재위 1826년~1853년)

 <러시아>
예카테리나 1세(재위 1725년~1727년)
안나 1세(재위 1730년~1740년)
옐리자베타 1세(재위 1741년~1762년)
예카테리나 2세(재위 1762년~1796년

 <폴란드>
야드비가여왕(재위 1382년~1399년)
안나여왕(재위 1574년~1586년)

 <덴마크>
마르그레테 1세(재위 1387년~1412년)
마르그레테 2세(재위 1972년~현재)

 <스웨덴>
크리스티나 여왕(재위 1632년~1654년)
울리카 엘레오노라여왕(재위 1718년~1719년)

 <오스트리아>
마리아 테레지아 1세(재위 1740년~178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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