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on 2008.06.09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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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 9일 (월)
▲국내외 주요사건
1815년 = 유럽 200여개 국가.도시 대표들, 나폴레옹 전쟁 사후 처리위한 빈강화협약 체결
1885년 = 프랑스와 청나라, 톈진(天津) 강화조약 체결
1898년 = 영국, 청나라로부터 주룽(九龍)반도 조차
1904년 = 한일양국인민어채구역조례(韓日兩國人民漁採區域條例)) 고시
1909년 = 의병장 하상태, 장단(長湍)에서 일병의 습격을 받고 자결
1920년 = 원산부청(元山府廳) 직원들, 평민회 조직
1926년 = 한용운, 송세호, 6.10만세운동 계획 혐의로 선학원에서 검거
1929년 = 카네기재단 후원으로 미국 신문기자 일행 12명 내한
1953년 = 남한 각의, 남북휴전협정 거부 결의
1954년 = 한국일보 창간. 일본, 방위청 설치법 및 자위대법 공포. 제 3대 민의 원 선거
1959년 = 세계 최초의 원자력 잠수함인 미국의 '조지 워싱턴호' 진수
1967년 = 가말 아브델 나세르 이집트 대통령, 6일전쟁 참패 책임지고 사임
1976년 = 남한 적십자사, 북한 적십자에 추석성묘단 교류 제의
1981년 = 미국 하버드대에 한국학연구소 설립
1983년 = 김영삼 전신민당 총재, 민주화요구 단식 23일만에 중단
1987년 = 연세대생 이한열군, 교내시위도중 경찰 최루탄에 맞아 의식불명(7월 5일 사망)
1991년 = 필리핀 피나투보 화산 폭발 주민 754명 사망. 후세인 요르단 대통령, 정당결성 금지 33년만에 다당제 민주주의 도입 승인
2000년 = 롯데호텔 노조 파업
2001년 = 모하마드 하타미, 이란 대통령에 재선
2002년 = 임신부등 탈북자 3명, 베이징 한국영사관 진입 망명 요청        <출처 : 대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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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기자 정태원씨 촬영)

1987년 6월 9일 교문앞에서 시위 중이던 학 대학생이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부상을 입고 끝내 사망하는 일이 벌어졌다. 사건의 당사자인 이한열군은 전라남도 화순 출생으로 광주진흥고등학교를 나와 연세대 경영학과 2학년에 재학중이었다. 이한열군은 경찰이 쏜 최루탄에 머리를 맞고 세브란스 병원으로 옮겨 치료를 받았으나 1987년 7월 5일 뇌손상으로 사망하였다.

불안한 정국

전두환 대통령의 5공화국 집권 마지막해인 1987년은 연초부터 정국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후계자로 지목된 민정당의 노태후 후보를 내세워 간접선거(일명 체육관 선거)를 통해 집권연장을 하려던 당시 군부세력에 국민들은 온몸으로 거세게 저항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2월에 발생한 서울대생 박종철군에 대한 고문 치사 은폐사건은 마침내 국민들의 저항에 기름을 붓는 형국이 되었다. 하지만 전두환 대통령은 4.13 호헌조치를 통해 직선제 개헌을 하지 않고 당시의 간선제로 대통령을 선출할 것을 천명했으며 이에 항의하는 시민들이 마침내 거리로 나서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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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0일 서울 시청앞에 모인 시위 군중들


처음에는 대학생들만의 거리시위로 시작되었던 것이 박종철씨 고문치사 은폐사건을 거치며 재야단체와 여러 시민단체들이 연합해 1987년 6월 10일 [박종철씨 고문치사 은폐사건 규탄대회]를 열기로 하면서 전국민적인 저항으로 이어졌다. 이한열씨는 그 당시 내일로 예정되어 있던 규탄대회에 참가하기 위한 연세대 출정식에 참가 하였다가 교문진출을 시도하여 전경들과 대치하던 중 변을 당한 것이다. 이일을 계기로 우리가 지금 [6.10항쟁] 이라고 부르는 민주화 투쟁을 거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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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0항쟁

1987년 6월 10일에는 국민들은 거리에 모여 전두환 정권을 비판하고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는 반면 전두환대통령은 육사 11기 동기인 노태후씨를 대통령 후보로 지목하는 민정당 제4차 전당대회를 열고 있었다.서울시청 , 서울역,명동등에 모인 시민들은 "호헌철폐" , "독재타도"를 외치며 진압하는 전경들과 맞서고 있었다. 당시에는 학생들 뿐만이 아닌 연도에 있던 시민들 , 건물안에 있던 회사원들 까지 창문을 열고 같이 구호를 외쳤으며 거리행진하는 시위대에게 박수를 보냈다. 이렇게 진행된 6.10 항쟁은 6월 29일 노태후 당시 민정당 대통령 후보의 시국수습책인 [6.29 선언]을 이끌어 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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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9일 시국특별선언을 하는 당시 노태우 민정당 대통령 후보



역사는 퇴풀이 되는가?

2008년 대한민국 여름은 또다시 뜨겁게 시작하고 있다.
많은 시민들이 "쇠고기수입반대"와 "전면재협상"을 외치며 6월의 서울거리를 행진하고 있다.
20여년전의 그 때와는 시위 분위기와 양상도 사뭇 다르다. 돌과 화염병, 그리고 최루탄이 없어진 시위장.
하지만 나라를 걱정하고 국민들의 삶을 걱정해서 거리로 나와 자신의 주장을 외치는 사람들의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촛불집회 , 문화제 , 공연등의 그 표현 방법이 달라 졌을 뿐 민주주의를 위해 외치는 모습은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다. 헤겔은 변증법에서 역사는 나사선 모양으로 발전하며 되풀이 된다고 했다. 똑같은 위치이지만 예전보다는 한단계 업그레이드 된 위치에서의 반복이다. 국민들의 시위문화는 나선형으로 발전했는데 정부의 국민들 목소리에 귀 기울지 않는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 듯 해서 그것이 답답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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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on 2008.05.30 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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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5월 30일


▲국내외 주요사건
1431년 = 프랑스 성녀 잔다르크, 마녀로 몰려 19세 나이에 화형에 처해짐
1539년 = 스페인 탐험가 에르난도 데 소토, 아메리카 대륙 플로리다에 상륙
1814년 = 유럽국가들, 나폴레옹 전쟁 끝내는 파리강화조약 체결
1910년 = 일본 육군대장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3대 조선통감에 취임
1924년 = 독립운동가 노백린(盧伯麟),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총장(軍務總長.참모총장격)에 취임. 중국과 소련, 국교회복 협정 체결
1930년 = 만주 간도거주 조선인들, 반일 독립 무장봉기(5.30 간도사건)
1950년 = 제 2대 국회의원(민의원) 선거
1960년 = 32년간 독재한 도미니카 공화국 대통령 라파엘 트루히요, 정적에게 피살
1962년 =정치정화위원회, 정치활동 적격판정자 1천336명 공고. 제 7회 월드컵 대회, 칠레서 개막
1968년 = 김종필 공화당 의원, 당 의장 및 의원직 사퇴하고 정계은퇴 선언
1972년 = 일본 적군파 게릴라들, 이스라엘 텔아비브 공항서 자동화기 난사해 22 명 살해
1975년 = 국군, 휴전선 일대 전방 방위벽 구축 완료
1979년 = 신민당, 전당대회서 김영삼씨를 총재로 선출
1982년 = 스페인,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 16번째 회원국으로 가입
1995년 = 저인망 어선 '86우성호', 백령도 서북쪽 해상에서 북한군에 나포(그 과정에서 선원 8명중 3명이 북한 해군의 총격으로 사망)
1997년 = 한신공영 법정관리 신청. 국내 첫 소비자파산 선고
1998년 = 천주교 정진석(鄭鎭奭) 주교, 13대 서울 대교구 교구장과 제 9대 평양교구장 서리에 임명. 아프가니스탄에 강진, 주민 5천여명 사망
2000년 = 건교부, 준농림지 폐지 발표


파란만장한 삶 - 나폴레옹

나폴레옹 1세 (1769.8.15~182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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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중해 코르시카섬 아작시오 출생이다. 카를로 보나파르테와 레티치아 라몰리노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나기 바로 전 제노바는 코르시카를 프랑스에 할양했다. 그 뒤 코르시카 사람들은 프랑스의 점령에 저항했고 카를로 역시 파스콸레 파울리가 이끄는 코르시카 독립운동에 참여했으나 파올리가 망명하자 카를로는 프랑스인과 타협했다. 프랑스혁명의 사회적 격동기 후의 안정에 편승하여, 제1제정을 건설하였다. 군사·정치적 천재로서 세계사상 알렉산드로스대왕·카이사르와 비견된다. 아버지가 지도자 파올리를 따라 프랑스에 대한 코르시카 독립운동에 가담하나, 싸움에 진 뒤에는 도리어 프랑스 총독에게 접근하여 귀족의 대우를 받았다.

 1795년 10월 5일(방데미에르 13일), 파리에 반란이 일어나 국민공회(國民公會)가 위기에 직면하자, 바라스로부터 구원을 요청받고, 포격으로 폭도들을 물리쳤다.이 공적을 기회로, 1796년 3월 바라스의 정부(情婦)이자 사교계의 꽃이던 조제핀과 결혼, 총재정부로부터 이탈리아 원정군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이탈리아에서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하여 5월에 밀라노에 입성, 1797년 2월에는 만토바를 점령하는 전과를 올렸다. 10월 오스트리아와 캄포포르미오(Campoformio)조약을 체결하여, 이탈리아 각지에 프랑스혁명의 이상을 도입한 인민공화국을 건설하였다. 그의 명성은 프랑스에서도 한층 높아졌다. 하루 3시간만 잔다는 소문도 있었으나, 비서 브리센에 의하면 건강에 항상 신경을 써서 하루 8시간은 잤다고 한다.

  1798년 5월 5만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이집트를 원정하여 결국 카이로에 입성하였다. 7월 해군이 아부키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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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센 원정 중의 나폴레옹>

(灣)에서 영국함대에 패하여 본국과의 연락이 끊기자 혼자서 이집트를 탈출, 10월에 프랑스로 귀국하였다. 곧 그를 통해 총재정부를 타도하려는 셰이에스 ·탈레랑 등의 음모에 말려들었다. 1799년 11월 9일(브뤼메르 18일) 군을 동원, 500인회를 해산시켜 원로원으로부터 제1통령으로 임명되고, 군사독재가 시작되었다.

그의 독특한 통치방식은 혁명후의 안정을 지향하는 과도기의 사회상황에서 보나파르티즘이라는 나폴레옹의 정치방식이 확립되었다. 제1통령으로서 국정정비 ·법전편찬에 임하고, 대(對)오스트리아와의 결전을 서둘러 1800년 알프스를 넘어 마렝고에서 전승을 이룩하였다.

  1802년에는 영국과 아미앵화약을 맺고, 1804년 12월 인민투표로 황제에 즉위하여 제1제정을 폈다. 즉위소식을 들은 L.베토벤이 《영웅 교향곡》의 악보에서 펜을 던지고, ‘인민의 주권자도 역시 속물이었다’고 한탄하였다고 한다. 영국을 최대의 적으로 간주하던 그는 즉위하자, 곧 상륙작전을 계획하였다. 1805년 가을 프랑스함대는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H.넬슨의 영국해군에 다시 격파되어, 그의 웅도(雄圖)는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같은 해 12월 아우스터리츠전투에서 오스트리아 ·러시아군을 꺾은 이래, 프랑스육군은 전유럽을 제압하여 위광을 전세계에 떨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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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처음 유배지 엘바섬>

1809년 조제핀과 이혼, 이듬해 오스트리아 황녀 마리 루이즈와 재혼하였다. 그러나 1812년 러시아원정에 실패하면서 운세도 기울어져, 1814년 3월 영국 ·러시아 ·프러시아 ·오스트리아군에 의해 파리를 점령당하고, 그는 엘바섬으로 유배되었다.
1815년 엘바섬을 탈출. 그의 지지자들과 파리로 입성하여 다시 황제로 취임하였으나 워털루 전투에서 에서 웰링턴 장군이 이끄는 영국군에 패배하여 다시 대서양의 세인트 헬레나 섬에 유배되었고 그 곳에서 죽음을 맞이하였다.

나폴레옹에 관련된 재미있는 이야기

1. 나폴레옹 1세는 항상 재킷 안쪽으로 한 손을 넣고 있는 것으로 그려지는데, 그 이유는 만성적인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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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쪽 재킷에 손을 넣은 나폴레옹의 모습>

경성 가려움증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으며, 종종 복부의 아픈 부위를 피가 날 때까지 긁었다고 한다.

2. 나폴레옹은 프랑스에서 태어나지 않았고 이탈리아인 부모에게서 지중해 코르시카 섬에서 태어났다.

3. 나폴레옹의 치질은 워털루 전쟁의 패배에도 영향을 끼쳤는데, 말을 타고 전장을 순찰 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4. 알루미늄으로 만든 최초의 제품은 1850년대 나폴레옹 3세를 위해 만든 장난감 딸랑이였다고 한다. 나폴레옹도 자신의 최고 귀빈들에게 알루미늄으로 만든 포크와 나이프를 선물했다고 한다. 당시에 새로 발견된 이 금속은 아주 귀해서 금보다 더 소중하게 여겼다고 한다.

5. 보고에 의하면 나폴레옹은 군대 출정 시 항상 초콜릿을 가지고 가서 기운을 올릴 필요가 있을 때 때 먹었다고 한다.

6. 나폴레옹은 군대들이 배가 불러야 행진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1975년 음식 보관을 위한 실용적인 방식에 대한 시상을 제안했다. 그 상은 프랑스 발명가 니콜라스 아페르(Nicholas Appert)가 수생했다. 그가 고안한 것은 캉통 통조림이었고 오늘날 통조림 음식 산업의 시초가 되었다.

7. 고대에는 신부 드레스의 전통적인 색상은 붉은색이었는데, 나폴레옹 3세의 아내가 이 전통을 깨고 흰 가운을 입었다. 이후 신부들이 부의 상징으로 흰 가운을 입기 시작했다.

8.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 웰링턴  작이 워털루 전쟁에서 탄 말들의 이름은 각각 백마 종마인 ‘마렝고(Marengo)’와 구렁말인 ‘코펜하겐(Copenhagen)’이었는데, 이는 두 사람이 승리를 거둔 유명한 전장의 이름을 딴 것이다.

   ※ 마렝고 : 1800년 나폴레옹 1세가 오스트리아를 대파 한 곳.

9. 나폴레옹은 남자들이 여자의 스커트를 무릎까지 들어 올리면 35프랑과 허벅지까지 올리면 70프랑의 벌금을 물리는 규정을 제정했다.

10. 미국의 기밀국(U.S. Secret Service.)의 코드명 ‘나폴레옹’은 프랭크 시나트라(Frank Sinatra)이었다.

11. 나폴레옹은 전투 시 항상 검은 실크 손수건을 목에 둘렀는데, 워털루 전투에서 흰색 목도리를 착용했다가 그 전투에서 패했다.

13. 나폴레옹 1세는 흰 말을 너무 좋아해서 무려 50마리나 소유하고 있었다.

14. 나폴레옹은 수학자와 물리학자들은 총애했지만 인문주의자들은 말썽꾸리기로 여겨 배척했다고 한다.

15. 나폴레옹은 26세 이전에 이탈리아를 정복했다.

16. 나폴레옹은 고양이 공포증인 ‘아일루로포비아’(ailurophobia)를 겪었다고 한다.

17. 나폴레옹은 14,000개의 프랑스 법령을 단순화시켜 7개의 법률로 통합했다. 이는 현대 역사상 한 국가의 법을 모든 시민들에게 평등하게 적용되도록 한 최초의 조치였다. 나폴레옹의 7개 법률은 아주 인상적이어서 1960년까지 70개 이상의 정부들이 이 법을 본받아 쓰거나 그대로 사용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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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시절 프랑스여인이 요요를 하는 모습>

18. 나폴레옹의 강적인 웰링턴 공작은 능숙한 요요 선수였다고 한다. 당시 요요는 ‘반다로레’("bandalore")로 알려져 있었다.

19. 대부분 사람들이 나폴레옹이 키가 작다고 생각하지만, 실제 나폴레옹의 키는 167.6cm 이고 당시 프랑스 남성의 평균 키에 해당한다.

20. 나폴레옹의 음료수 컵 중 하나는 유명한 이탈리아 모험가 칼리오스트로(Cagliostro)의 해골로 만들었다고 한다.

21. 1978년의 한 조사에 의하면 그해 8월 14일에 방송된 한 프랑스 텔레비전 프로그램은 단 한명의 시청자도 없었다고 하는데, 그 프로그램은 40회 생일을 맞은 한 미국 여성과의 심층 인터뷰였는데, 그 여성이 남편과 만난 과정과 생활의 즐거움 등을 방영했다고 한다. TV 조사에 따르면 당시 시청자의 67%가 나폴레옹 1세의 풍속 드라마를 보았고, 나머지 33%는 다른 프로그램을 시청했는데, 한명의 시청자도 없었던 그 프로그램은 피크 타임에 방송되었다고 한다.

22.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 관련된 미국인들이 많다. 나폴레옹의 막내 동생 제로메(Jerome)는 미국인과 결혼했다. 기니피그("guinea pig")라는 어휘는 영국의 휘그 당원들이 나폴레옹 전쟁을 돕기 위해 낸 밀가루에 부과한 세금에서 유래되었다. 기니(영국의 금화)를 낸 사람 명단은 자신들의 교구 교회 문에 부착했으며, 이 사람들이 당시 부자들이었기 때문에 오늘날 ‘기니피그’로 알려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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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 시절 영국의 기니금화>


Posted on 2008.05.28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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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5월 28일(수)
▲국내외 주요사건
1901년 = 제주도에서 '이재수(李在守)의 난' 발생해 주민과의 충돌로 천주교도 700여명 피살
1905년 = 경부선 철도 개통식
1923년 = 미국 연방 법무장관, 원하는 여성들의 바지 착용 합법화
1935년 =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APF) 해산
1940년 = 벨기에, 2차대전 당시 독일군에 항복
1959년 = 미국 주피터 우주선, 원숭이 2마리 태운 우주비행 성공리에 마치고 지구 귀환
1961년 = 국가재건최고회의, 부정축재자처리요강 발표
1964년 =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창립
1973년 = 정부, 인공임신중절 등의 허용 시기와 한계를 규정한 모자보건법 시행령 공포
1980년 = 장훈 선수, 일본 프로야구사상 첫 3천개 안타 기록.
1981년 = 신군부 정권이 국민축제로 기획한 '국풍(國風)81', 서울 여의도에서 개막
1982년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영국 방문해 영국국교회(성공회)와 가톨릭교회 448년만에 화해
1984년 = 국제올림픽위원회(IOC), '88 서울 올림픽대회일정 승인
1985년 = 제 8차 남북적십자 본회담 12년만에 재개, 이산가족 고향방문과 예술단 상호방문에 합의
1986년 = 서울 올림픽공원 준공
1987년 = 구서독 청년 마티아스 루스트군, 세스나기를 몰고 핀란드를 출발 소련방공망 뚫고 모스크바 광장에 착륙해 세계를 놀라게 함
1988년 = 노태우 대통령, 3개 야당 총재들과 청와대 회동갖고 5공비리 등 현안해결 방안 논의
1989년 =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결성
1995년 = 러시아 사할린에 진도 7.2 강진 발생해 주민 3천500여명 사망
1998년 = 파키스탄, 인도의 핵실험에 대응 5차례의 지하 핵실험 실시
1999년 = 김대중대통령, 모스크바에서 한-러 정상회담
2000년 = 현대그룹, 현대건설 자산매각 등 구조조정계획 발표
2003년 = 대북송금 의혹 사건 관련 이기호 전 청와대 경제수석 긴급체포. SK글로벌 채권은행단, 법정관리 추진 결정

재일교포로서의 어려운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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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훈 선수는 한국이 해방될 무렵 1940년에 일본 히로시마에서 태어났다.그 당시 일본은 패전하고 경제와 정치가 매우 어수선한 상태였다. 한국 역시 오랜 일본의 식민기간으로 일본 못지 않게 어수선한 시기여서 일본에 있던 많은한국사람들이 일본에 남아 야만 했다. 이러한 어수선한 시기이다보니 다수의 일본사람들이한국사람을 핍박하여 매우 어렵게 지낼수 밖에 없었다.

장훈 선수 역시 마찬가지 였다.
고교재학시절 투수겸 4번타자로 이미 명성이 드높았으나, 한국인을 싫어했던 야구부 담당교사에 의해 교내 폭력사건의 주동자로 몰려 고시엔에 나가지 못하는 설움을 당했던 그는 1959년 고교졸업후 도에이 플라이어즈에 입단했다. 그해 .275의 타율을 기록하며 퍼시픽리그 신인왕을 차지하더니만 이듬해 바로 3할을 돌파했다. 이 시즌을 포함해 그는 총 16시즌에서 3할을 상회하는 타율을 기록한다. 1961년에는 생애 첫 타격왕타이틀(.336)을 따내고, 1962년에는 .333, 31홈런, 99타점, 23도루의 기록을 작성하며 마침내 퍼시픽리그 MVP에 올랐다. 아울러 소속팀 플라이어즈의 재팬시리즈 우승이라는 감격도 경험했다.
어렸을적 입은 화상으로 오른손의 두 손가락이 붙어버리는 장애를 딛고 이뤄낸 기록이라는 사실은 그의 업적을 더욱 위대하게 빛내준다. 더구나 그는 끝까지 귀화를 거부한 채 자랑스런 한국인으로 남았다.

3000안타의 대기록

1980년 5월 28일 일본 도쿄 근교 가와사키 야구장. 당시 롯데 마린스의 지명타자였던 그는 6회말 1사 2루의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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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0안타의 기록을 달성하던 순간>

에서 담장을 넘기는 홈런으로 3000안타의 위업을 달성했다. 그동안의 설움과 핍박을 일순간에 날려버리는 홈런이었다.장훈선수는 일본인들이 자신을 무시하고 차별할 때 이를 악물고 야구를 했다고 한다. 그에 이런 각오는 3000안타 이후의 인터뷰에도 잘 나와 있다.

“내가 치는 홈런과 안타 하나하나는 일본인에게 차별받고 멸시당하는 재일 조선인들의 가슴에 맺힌 응어리를 풀어주고 있으며 자랑스러운 우리 조선 동포들을 차별하는 비열한 일본인들에 대한 내 나름대로의 시원한 복수다.”

장훈 선수는 그 이후에도 은퇴때까지 85개의 안타를 추가로 더 기록했으며 은퇴후에는 TBS 에서 야구해설을 했다.또한 한국야구위원회 고문으로 활동하며 한국야구발전에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그가 위대했던건 단순히 3000안타를 달성했다는 기록적인 면이 아니라 온갖 시련과 역경을 이기고 차별과 멸시가 남무하던 일본에 자랑스런 한국인으로서 긍지를 보여 줬다는 점일 것이다.
이기록은 28년이 지난 지금도 일본 프로야구에서 깨지지 않고 있다. 참고로 미국 메이저리그의 기록은 피트 로즈가 1963년부터 1986년까지 23년동안 기록한 4256안타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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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기 장훈선수의 타격폼-일명 부채살타법>

장훈선수 통산기록

통산 출장경기-2752경기(역대 3위)
통산 타율- .31915(역대 3위)
통산 안타- 3085개(역대 1위)
통산 홈런- 504개(역대 7위)
통산 타점- 1676 타점(역대 4위)
통산 도루- 319 도루(역대 20위)
통산 희생타- 4개
통산희생 플라이- 90개(역대 5위)
통산 사구- 1274개(역대 3위)
통산 데드볼- 78개
통산 삼진- 815 삼진
통산 병살타- 145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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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훈선수와 이승엽선수>



Posted on 2008.05.27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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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5월 27일(화)

▲국내외 주요사건

1905년 = 러시아 발트함대, 동해서 일본해군에 궤멸

1906년 = 대한제국, 의병해산조칙(義兵解散詔勅) 내림

1927년 = 신간회 자매단체인 근우회(槿友會), 김활란(金活蘭) 박사 등의 주도로 창립

1933년 = 미국 시카고 만국 박람회 개막

1934년 = 제 2회 월드컵, 이탈리아에서 개막

1937년 =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금문교(金門橋) 개통

1941년 = 영국 해군, 프랑스 근해에서 독일 최대전함 비스마르크호 격침시켜 2천300여명 사망

1946년 = 미군정, 서울에서 공창제 폐지

1949년 = 칠레, 대한민국 승인

1961년 = 정부, 부흥부를 건설부로 개칭

1963년 = 민주공화당, 대통령 후보에 박정희(朴正熙) 지명

1966년 = 일본, 약탈 한국 문화재 1천300여점 반환

1967년 = 경인고속도로 기공

1968년 = 제 1차 한.미 국방장관 회담, 워싱턴서 열림

1969년 = 구엔 반 티우 월남 대통령 방한

1979년 =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과 메나헴 베긴 이스라엘 총리, 양국 국경개방 발표

1980년 = 비상계엄군, 광주민주화 운동 무력 진압

1987년 = 미국과 베트남, 양국관계 정상화 합의

1988년 = 평화의 댐 1단계 준공. 미국상원, 중거리 핵미사일 폐기협정 비준

1994년 = 러시아 반체제 작가 알렉산데르 솔제니친, 해외망명 20년만에 귀국

1996년 =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 휴전협상 위해 체첸 반군지도자와 사상 첫 대면

1998년 = 민주노총, 시한부 총파업 돌입. 일본왕 아키히토(明仁), 영국 방문중 태평양 전쟁때 일본군이 영국군 포로에 가한 가혹행위에 대해 유감 표명

1999년 = 정부, 플라스틱으로 만든 새 주민등록증 발급. 유엔전범재판소, 현직 국가원수로는 최초로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유고 대통령을 전범혐의로 기소

2002년 =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서울대 법대 최종길(崔鍾吉) 교수 '의문사'로 인정

                                                 <출처:대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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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더 록 의 한장면>

영화 007시리즈에 자주 등장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007의 주인공이었던 "숀 코넬리"가 나오는 영화 "The Rock"에서도 등장하는데 이 영화의 배경 알카트라즈 아일랜드 옆에 나오는 붉은 교량이 바로 Golden Gate Bridge 이다.
원래 이 다리의 색상은 연한 빨강과 진한 홍색 쯤인데.. 이 다리가 노을이 질 때 그 빛을 받으면 금색깔이 된다고 해서 Golden Gate Brige가 되었다고 한다. 한편으로 이다리에서 약 1000명이 자살을 했다는 악명도 붙여져 있다.


길이는 2,825m, 너비는 27m이다. 남안의 샌프란시스코와 북안의 마린반도를 연결하는 최단거리에 놓인 현수교로, 조셉 B.스트라우스가 설계하였고, 1933년에 착공하여 1937년에 준공하였다. 공사비용은 3,500만 달러가 들었다. 차고 거센 조류와 안개가 많은 날씨 그리고 수면 아래 지형이 복잡하여 건설이 불가능할 것으로 예측되었으나 4년 만에 완공하여, 미국 토목학회에서 7대 불가사의의 하나로 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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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질 무렵의 금문교 풍경>


다리를 만든 철근 와이어는 케이블 길이가 2331.7 미터 이고  케이블 직경이 92.4 센티미터 이다. 사람키의 절반 만한 굵기 이다.
그리고 그것은 아주 얇은 27,572 개의 케이블을 꼬아서 만든 큰 케이블이다. 그 전체의 와이어의 길이는 128,748 키로미터 길이의 강선을 꼬아서 만든것이다. 그 다리를 지탱하고 있는 큰 와이어안에 수천가닥의 강철선들이 꼬여서 만들어 진것이다. 케이블 만의 무게가 24,500 톤이나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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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문교 공사에 사용되었던 철제케이블의 모습>


금문교는 재미 있는 제한이 많다. 다리는 4-10월 사이에는 아침 5시부터 밤 9시까지 걸어갈수 있다.
밤에는 걸어서 넘어갈수 없고, 다음날 아침  5 시가 되어야 걸어서 넘어 갈수 있다.
다리에선 롤러 블레이드와 스케이트보드, 롤러 스케이트 는 타고 갈수 없다. 자전거도 제한을 해서 건너 다닌다.
동쪽길로는  아침 5 시 부터 저녁 3 시 반까지만 건너 갈수 있고, 서쪽길로는 오후 3 시 반부터 밤 9시 까지만 넘어갈수 있다.
주말과휴일에는 서쪽길로는 아침 5 시부터 저녁 9시 동쪽길로는 저녁 9시부터 아침 5 시사이에 갈수 있다.
다리위에서는 교통 제한 속도가 45 마일 이면서 다리를 건너서 샌프란시스코로 들어올때에 5불을 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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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는 준공후 철저한 유지,관리로 한해도 거르지 않고 보수,보강 공사를 하며 다리 양쪽에는 공원을 조성해 많은 관람객들을 유치하고 있다. 또한 금문교를 배경으로 또는 금문교가 나오는 영화들도 많이 제작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것으로는 007뷰투어킬 A View to a Kill (1985), 골든 게이트 Golden Gate (1994), 존 슐레진저 감독의 <퍼시픽 하이츠 Pacific Heights (1990)>, 유위강 감독의 <소살리토 一見鍾情 / Sausalito (2000)>, 필 조아누 감독의 <최종분석 Final Analysis (1992)>, 마이클 베이 감독의 <더 록 The Rock (1996)>, 알프렛 히치콕 감독의 <현기증 Vertigo (1958)>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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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속의 금문교>



Posted on 2008.05.23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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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5월 23일
▲1920년=인도네시아에서 아시아 최초로 공산당 창당
▲1939년=영국의회, 팔레스타인이 1949년까지 독립하는 계획 승인
▲1960년=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 2차대전 당시 유대인 학살 주도한 전 나치 지도자 아돌프 아이히만 체포
▲1985년=대학생 73명, 광주민주화운동 진압과 관련 미국의 사과 요구하며 서울 미문화원 점거 농성
▲2003년=5차 남북 경협추진위, 쌀 지원, 경의선 동해선 연결관련 합의


                                                                                          < 출처 : 대전일보 >

Posted on 2008.05.22 1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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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5월 22일(목)


▲국내외 주요사건

1761년 = 미국 필라델피아주에서 생명보험제도 첫 탄생

1867년 = 캐나다, 대영제국 해외 식민지 국가로는 최초로 독립 의회.내각 등을 구성

1882년 = 조선, 미국과 수호통상조약 체결

1906년 = 고종의 계비(繼妃) 엄비(嚴妃)가 건립한 명신여학교(현 숙명여고 전신) 개교

1907년 = 이완용 내각 출범

1908년 = 미국 라이트 형제, 비행기 특허 획득

1939년 = 독일과 이탈리아, 정치.군사동맹 체결

1954년 = 제네바 정치협상회의에서 한국대표로 참석한 변영태(卞榮泰) 외무장관 , 한반도 통일방안 14개 제시

1955년 = 주한미군, 원조고문단 설치

1963년 = 한국, 오스트리아와 수교

1967년 = 홍콩에서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반영국 폭동 발생

1972년 =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으로는 최초로 소련 방문. 실론 공화국, 국명을 스리랑카 공화국으로 개칭

1974년 = 충남 아산만 방조제 준공

1975년 = 백인지배의 아프리카 로디지아, 인종차별 정책으로 올림픽경기에서 축출

1984년 = 서울 지하철 2호선 개통

1989년 = 인도, 중거리 지대지 미사일 실험발사 첫 성공

1990년 = 남.북 예멘 통일

1993년 = 현정화 선수, 제 42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서 여자 단식 우승. 캄보디아, 21년만에 최초로 다당제 총선 실시

2000년 = 민주당 이종찬 고문, 정계 은퇴 미국 유학 발표

2003년 = 전국공무원노조, 쟁의행위 찬반 투표 강행

<출처 : 대전일보>



하늘을 날고싶은 인간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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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신화에는 신이 아닌 인간의 신화도 등장하는데, 데이달루스의 이야기가 대표적이다. 그는 솜씨가 대단한 발명가이며 건축기술가였다. 데이달루스의 아들이 이카루스. 이들이 바로 자유를 찾기 위해 생명을 걸고 비행한 최초의 인간이다.
크레타 섬에 갇히게된 다이달로스는 아들 이카루스와 함께 자유를 향한 탈출을 꿈꾸게 된다. 미노스 왕의 감시의 눈초리가 심했던 육지와 바다가 아닌 푸른 창공을 향해 날아 오르리란 꿈을 꾸게 된다.
그들은 커다란 새의 깃털을 밀납의 이어 붙여 날개를 만들기 시작하고 마침내 그 날개를 착용하여 푸른 상공으로 날아오른다. 창공에서 무한한 자유를 느낀 이카루스. 하지만 태양에 너무 가까이 다가가 밀납이 녹아 결국 그는 바다에 추락해 죽고 만다.

인간 . 새처럼 날다.

신화속의 인간이 아닌 현실속의 인간이 새처럼 하늘을 처음 날아 오른 것은 1903년 12월 17일의 미국의 라이트 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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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였다.1903년 12월 17일 오전 10시 35분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키티호크 해안에서는 인류 최초의 비행기가 이륙했다. 자전거가게를 운영하던 36세의 윌버 라이트(1867-1912)와 32세의 오빌 라이트(1871-1948)가 만든 플라이어호가 12초 동안 36m를 나는 순간이었다. 이날 플라이어호는 59초 동안 2백90m를 나는 첫 기록을 세웠다.  
플라이어호는 4기통 13마력의 가솔린엔진을 단 최초의 동력비행기다. 풍동실험을 거쳐 활공하기 좋게 설계한 날개, 날개의 앞 부분을 상하로 움직일 수 있는 승강키, 그리고 비행기가 좌우로 움직일 수 있도록 수직 테일핀을 단 방향키 등을 갖춤으로써 마음대로 하늘을 날 수 있었다. 이 점은 몸의 체중을 이동해 방향을 조정해야 하는 글라이더와 근본적으로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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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하늘을 처음 정복하는 것은 1785년이었다. 프랑스의 몽골피에 형제가 더운 공기를 채운 기구를 이용해 하늘을 난 것이다. 그러나 기구는 바람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군사용 정찰 등의 특수목적 이외는 이용되지 않았다. 그 다음에 등장한 것은 글라이더였다. 1804년 영국의 조지 케일리경이 요크셔에서 처음으로 글라이더 비행에 성공했다. 이것은 동력이 없이 활공만 이용하므로 멀리 갈 수 없었다. 그래서 끊임없이 글라이더에 동력장치를 달려는 노력들이 기울여졌다. 그런데 라이트형제가 그 꿈을 이룬 것이다.  라이트형제의 플라이어호는 1906년 미국정부로부터 특허를 받았고, 미국 국방부에 납품하기 시작했다. 러시아와 이탈리아에서도 라이트형제의 비행기를 사갔고, 프랑스는 아예 라이트 조종사훈련학교를 개설했다.

20세기 최고의 발명품인 비행기는 라이트형제 이후 끊임없이 개발돼, 1909년에는 프랑스의 루이 블레리오는 3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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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 엔진을 부착한 비행기를 타고 도버해협(34km)을 34분만에 횡단하는 기록을 세웠다. 비행기가 진가를 발휘한 것은 제1차 세계대전이다. 당시 비행기의 속도는 시속 2백4km, 항속거리는 1천km에 이르렀다. 1차대전이 일어나자 비행기는 전쟁의 꽃으로 피어났고, 정찰기 폭격기 전투기 등 수많은 비행기가 등장했다. 1차대전 동안 제작된 비행기는 20만대, 전쟁이 끝날 무렵 비행기의 속도는 3백13km, 항속거리는 약 2천km에 이르게 됐다. 비행기가 민간항공으로 이용된 것은 전쟁이 끝난 후 1930년대이다.

20세기 최고의 발명품 중 하나인 비행기를 만든 라이트형제는 결혼도 하지 않고 죽을 때까지 항공기술의 발전에 노력했다.

Posted on 2008.05.21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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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5월 21일(수)
▲국내외 주요사건
1902년 = 개성-한양 전화 개통. 일본 제일은행 부산지점, 1원권을 발행 조선에서 유통시킴
1947년 =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 개막(7월 10일 결렬)
1956년 = 미국, 비키니섬에서 수소폭탄 실험 성공
1960년 = 정부, 내각책임제 개헌안 공고
1961년 = 군사혁명정부, 용공분자 2천여명과 깡패 4천200여명 검거 발표
1963년 = 무장군인들, 서울법원에 난입 데모학생 영장발부 요구
1977년 = 지미 카터 미대통령, 주한미군 철군계획 반대한 주한미군 참모장 존 싱글러브 소장 해임
1980년 = 박충훈(朴忠勳) 국무총리 서리 취임
1981년 = 새세대육영회 창립(회장 이순자)
1989년 = '89 국제로터리 클럽 세계대회 서울서 개막
1991년 = 인도 라지브 간디 총리, 유세도중 폭탄테러로 피살
1998년 = 32년 장기집권한 수하르토 인도네시아 대통령, 반정부 시위로 사임
 



한가로운 휴향지가 될 수 있었던 비키니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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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키니섬의 현재 모습>

비키니 섬. 정확히는 비키니 환초 (Bikini Atoll)는 서태평양 미크로네시아의 마샬제도 북부에 있는 환초이다.
랄리크 열도(列島)에 속하며, 북위 11 °35', 동경 165 °25'에 위치한다. 비키니 ·에뉴 ·나무 등 약 20개의 환초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것들에 둘러싸인 초호(礁湖)는 길이 34 km, 너비 17 km에 달한다. 환상적인 풍경을 자랑하며 유명한 휴향지가 될 수 있었던 이 섬의 운명은 1946년 미국의 원자탄 실험으로 한 순간에 뒤바뀌게 되었다.

1946년 미국은 비키니섬의 주민 176명을 강제로 몰아내고 섬에 돼지와 양을 풀어놨다. 핵 위력에 대한 생체 반응을 실험하기 위해서였다. 바다에는 파괴력을 알아보기 위해 패전국 일본과 독일 전함 20여 척을 띄웠다. 그리고 1946년 7월 1일... B-29 폭격기로 비키니섬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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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초의 원폭 공개 실험이었다.동서 35킬로미터, 남북 28킬로미터 아름답던 비키니 환초는 한순간에 불바다가 됐다. 모든 전함과 구조물은 파괴됐고 생물들은 방사능에 노출됐다. 46년 7월부터 58년까지 모두 23세차례의 핵폭탄 실험이 있었다 그중 1954년에 행해진 수소폭탄 실험에서는 섬 3개가 사라졌다.

비키니의 유래

1946년 란제리 상점을 운영하던 프랑스의 루이 레아드는 배꼽을 드러낸 수영복을 세상에 내놓았다. 당시엔 모델을 구하지 못해 스트립 댄서에게 입혀 광고할 정도로 논란이 됐다. 바티칸은 “부도덕한 의상”이라고 비난했고 스페인·이탈리아에선 아예 착용을 금지했다. 비키니란 이름은 지구 반대편 태평양의 환초에서 가져다 붙였다. 핵실험만큼 충격적인 패션이라는 이유에서였다.

비키니섬의 내일

1946년 섬에서 쫓겨나 난민생활을 하던 비키니 원주민들은 1968년 20여년만에 고향에 돌아왔다. 물론 미국은 안전을 장담했다. 그러나 갑상선암과 위암 환자가 늘어나더니 폐암 환자에다가 급기야 기형아가 태어나기도 했다. 6년뒤인 1974년 비키니 원주민들은 어쩔 수 없이 또 다시 섬을 떠나야만 했다.

현재 비키니 주민들과 미국정부는 비키니 섬을 되살리기 위한 협력을 하고 있다. 하지만 아무도 이 섬이 원상태로 돌아오는 데 얼마나 걸릴지 모른다. 섬에 지천으로 널린 코코넛(실험 이후 심은 나무) 열매와 바다가재, 조개등을 언제 먹을 수 있는지 아직은 확신이 없다.
인간의 탐욕이 인간의 파괴본능이 자연에게 커다란 죄를 짓고 있는 곳 . 바로 비키니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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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키니섬의 세 스핑크스 : 달리가 비키섬의 핵폭탄실험에 영감을 얻어 제작한 작품>



 

Posted on 2008.05.20 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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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년 5월 20일 (화)
▲국내외 주요사건
325년 =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 최초의 기독교 종교회의인 제1차 니케아 공의회 소집
1874년 = 미국 의류업자 리바이 스트로스, 구리 리벳이 박힌 청바지 첫 시판
1875년 = 길이.질량.부피 등의 국제적 표준 통일위한 미터법 파리서 조인
1882년 = 이탈리아, 독일-오스트리아 양국 동맹에 가담 3국동맹 결성
1902년 = 쿠바, 미국지배 벗어나 공화국으로 독립
1920년 = 멕시코 초대 대통령 베누스티아노 카란사, 군사반란으로 부하에게 피살
1926년 = 한용운의 시집 '님의 침묵' 출간
1927년 = 미국 비행가 찰스 린드버그, 뉴욕-파리 대서양횡단 논스톱 단독비행에 성공
1949년 = 남로당 국회 프락치 사건으로 김약수(金若水).이문원(李文源) 의원 등 구속. 미국무부, 주한미군 철수계획 발표
1954년 = 제 3대 국회의원(민의원) 선거
1961년 = 장도영(張都暎), 내각수반에 취임
1962년 = 정부, 야간통행금지 부활
1978년 = 일본 나리타(成田) 공항 개항
1980년 = 신현확(申鉉碻) 총리 내각, 대규모 반정부 소요사태에 대한 책임으로 총사퇴. 대법원, 김재규(金載圭) 중앙정보부장 등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 관련자 5명 사형 확정
1982년 = 영국군, 포클랜드섬 상륙작전 개시
1986년 = 서울대 이동수군 분신자살
1989년 = 자오쯔양(趙紫陽) 중국 총서기 실각
1990년 = 루마니아, 첫 자유총선거 실시
2002년 = 동티모르, 신생독립국으로 출범
2003년 = 대북비밀송금 의혹 관련 이근영 전 금융감독위원장 긴급체포

"님은 갔습니다."

중고등학교 시절 , 교과서에 나오는 시들을 무조건 외워야 하는 시기가 있었다. 시험을 위해서...
시속에 숨어있는 뜻도 모른고 서정시,서사시,은유법,비유법,청록파 등등...무수히 외웠던 많은 지식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어이없는 짓이었다. 시를 쓴 사람의 마음도 이해 못하면서 어떻게 시를 감상할 수 있을까.
하지만 무작정 외워던 그 많은 시들 중에도 어린 마음이지만 가슴이 울컥하거나 눈시울이 붉어지는 그런 시들도 있었다. 그런 감정이 하나 둘 생기면서 좋아하는 시인도 생기게 되고 교과서에는 나오지 않지만 그 들의 시를 일부러 헌책방에서 구입해 읽는 정성을 보이기도 했었다.
윤동주, 한용운 .
내가 학창시절에 가장 좋아했던 시인이다.
굳이 국어방법론적으로 분류하자면 둘다 여성취향적 문체를 가진 시인이다.
하지만 그런 분류 필요없이 난 그들의 시체가 좋았다. 순응과 절제와 조용한 외침들, 그런것들이 좋았다.
5월 20일은 만해 한용운의 [님의침묵] 시집이 발간된지 82주년이 되는 날이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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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의 침묵 시비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적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님의 침묵 - 전문 >

시 [님의 침묵]에 대한 설명은 굳이 하고 싶지 않다. 내가 말함으로써 읽는 이에게 선입견이 될 것이고 그것이 이 시를 올바르게 감상하는데 방해가 될 테니까. 시의 배경이 무엇이며, 이시의 님은 누구이며 , 작가의 사상은 무엇이며 이런 것들은 시를 감상하는 데 하등의 도움이 되지 못한다. 시를 분해하지 말고 시를 있는 그대로 한번 감상해 보자.

<만해 한용운 연표>
1879 충남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에서 부 韓應俊의 차남으로 출생, 속명은 貞玉, 법명은 용운, 법호는 만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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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 ~1897 향리에서 한학 수학 
1892 천안 전씨와 결혼 
1899 강원도 설악산의 백담사 등지를 전전 
1904 귀향하여 향리에서 수개월간 머물다 
1905 백담사 김연곡 스님에게서 득도. 김영제 스님에 의하여 수계. 이후 이학암 스님으로부터 <기신론>, <능업경>, <원각경> 등을 사사받음 
1908 4월경 일본으로 건너가 下關 등지를 순유하고 동경의 曹洞宗 대학에서 불교와 서양철학을 청강함. 10월경 귀국 
1910 <조선불교유신론> 탈고 (1913년 불교서관에서 간행) 
1912 불교경전 대중화의 일환으로 <불교대전>을 편찬하기 위해 양산 통도사의 고려 대장경을 열람함 
1913 불교강연회 총재에 취임. 박한영 등과 함께 불교 종무원을 창설. 통도사 불교강사에 취임. <불교대전>을 국한문으로 편찬(1914, 홍법원) 
1918 월간 교양지 <惟心>을 발간하여 편집인 겸 발행인이 됨 
1919 1월경 최린, 현상윤 등과 조선독립에 대해 의논함. 최남선이 작성한 <독립선언서>의 자구 수정을 하였으며 <공약 3장>을 추가함. 3월 1일 명월관 지점에서 33인을 대표하여 독립선언 연설을 하고 투옥됨. 7월 10일 <조선독립의 개요> 제출 
1926 시집 <님의 침묵>을 회동서관에서 발행하다 
1927 신간회 중앙집행위원 겸 서울지부장에 피선됨 
1931 김법린, 최범술 등이 조직한 승려비밀결사인 卍黨의 영수로 추대됨 
1933 유숙원과 재혼. 벽산 스님, 방응모, 박광 등의 도움으로 성북동에 尋牛莊을 짓다. 여기에서 소설 <흑풍>, <죽음> 등을 조선일보에 연재하다. 
1944 6월 29일 심우장에서 이적. 미아리에서 화장하여 망우리 공동묘지에 묻히다 

만해 한용운을 이야기 할 때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독립운동가,승려,시인.
그에 독특한 인생경로도 사람들의 많은 호기심을 일으키지만 무었보다도 그는 자신의 소신을 항상 굽히지 않고 이야기 할 수 있었던 , 그 당시로는 정말 몇 안되는 절개를 지닌 사람이었다.
선생의 이러한 정신은 다음과 같은 일화에도 잘 나타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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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홍성의 만해선생 생가


일본이 통치하는 동안 그들은 처음엔 민적(民籍), 그 후엔 호적법(戶籍法)을 실시했다.
선생은 처음부터 "나는 조선 사람이다. 왜놈이 통치하는 호적에 내 이름을 올릴 수 없다."고 하며, 시집 《님의 침묵》에도 '나는 민적이 없어요'라는 구절이 있듯이 평생을 호적 없이 지냈다. 그래서 선생이 받는 곤란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신변 보호를 받을 수 없었던 것은 물론, 모든 배급 제도(쌀 고무신 등)에서도 제외되었다.
그보다도 큰 문제는 선생이 귀여워하던 외딸 영숙이가 학교를 다닐 수 없었던 점이었다. 아버지가 호적이 없으니 자식 또한 호적이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선생은 돌아가시는 날까지 "일본놈의 백성이 되기는 죽어도 싫다. 왜놈의 학교에도 절대 보내지 않겠다."하고는 집에서 손수 어린 딸에게 공부를 가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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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담사 만해 기념관


최근 일본에서는 2012년 부터 사용하는 중학교 교과서에 독도가 일본 영토임을 표기하는 내용을 담겠다고 합니다. 마치무라 노부타카 일본 관방장관은 "다케시마가 일본 영토라는 정부의 일관된 주장에는 변함이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얼마전에는 인터넷에 이명박 대통령이 독도를 포기했다라는 유언비어가 돌기도 했습니다.
오늘같은 세태에 한용운 선생과 같이 올곧은 분이 있었더라면 우리들 모두에게 힘이 되지 않았을까. 그리고 일본의 관리들이 저렇게 망언을 늘어놓지는 못했을 거라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Posted on 2008.05.16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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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5월16일>

1804년 = 프랑스 상원, 나폴레옹 황제로 옹립
1871년 = 미국 함대, 강화도 해안으로 침입해 신미양요(辛未洋擾) 발발
 
1920년 = 제 1회 전조선체육대회 개최
1929년 = 미국 할리우드 루스벨트 호텔에서 제 1회 아카데미상 시상식
 
1951년 = 국회,제 2대 부통령에 김성수(金性洙) 선출
1961년 = 박정희 소장이 주도한 군사 쿠데타 발생, 장면 내각 붕괴
 
1965년 = 박정희 대통령, 첫 미국 방문
 
1966년 = 중국 문화대혁명 시작
1970년 = 서울대교(현 마포대교) 개통
 
1977년 = 가계수표제도, 서울지역서 첫 실시
 
1989년 = 정명훈(鄭明勳)씨, 프랑스 국립 바스티유 오페라단 음악총감독겸 상임
 
지휘자에 취임. 카를로스 메넴, 아르헨티나 대통령에 당선
 
1991년 = 프랑스 첫 여성총리 에디트 크레송 취임.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 영국 군주로는 최초로 미국 의회에서 연설
 
1995년 = 일본경찰, 도쿄 지하철에서 사린가스 테러 자행한 옴진리교 교주 아사하라 쇼코 체포
 
1999년 = 모하마드 하타미 이란 대통령, 회교혁명후 이란 지도자로는 최초로 사우디아라비아 방문
 
2001년 = 경기도 광주시 기숙입시학원 화재로 30여 명 사상
 
2002년 = 분당 파크뷰아파트 특혜분양 관련 에이치원개발 홍원표 사장 구속
 
2003년 = 이라크 긴급 의료지원단 출발


제1회 아카데미 시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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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계 영화인이라면 누구나 한번은 그 수상을 상상해 보는 아카데미상(오스카상)은 어떻게 시작 되었을까?
제1회 아카데미상 시상식은 1929년 5월 16일 헐리웃의 루즈벨트 호텔에서 270여 명의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되었다. 당시의 아카데미상은 고작 20여 명의 멤버로 구성된 위원회가 12개 부문의 수상작을 선출하는 보잘것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3년 후인 1932년에는 100명의 위원들이 선출에 임하는 대규모 시상식으로 성장하였다. 처음 15년간은 호텔에서 거행되다가 1944년부터 극장 상영에 이익이 되도록 시상식을 극장에서 거행하였고, 1969년부터는 LA 카운티 뮤직 센터 '도로시 챈들러 파빌론'에서 거행되었다. 이후 1988년부터는 슈라인 오디토리움(Shrine Civic Auditorium)과 번갈아가며 진행되다가 2002년에 헐리우드에 코닥 극장(Kodak Theatre)이 아카데미 전용 시상식장으로 사용되었다. 한편 1953년부터 NBC-TV에서 최초로 방송 전파를 탔다.

왜 오스카상이라고 부를까?

오스카는 아카데미상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는 용어로 원래는 황금상의 닉네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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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황금상은 아카데미 시상식 개최를 결정하게 된 회의에 참석했던 미술가 세드릭 깁슨이 그린 그림에서 비롯됐다.
그것은 골격이 우람한 남자가 십자군의 칼을 쥐고 필름릴 위에 서 있는 모습이었고, 이를 조각가 조지 스탠리가 점토를 이용해 최초로 트로피로 만들었다.그 뒤 알렉스 스미스에 의해 주석 2.5%, 동 7.5%에 금도금이 된 높이 34cm, 무게 3.1kg의 황금상인 오스카가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아카데미 트로피가 '오스카(Oscar)'라는 별명을 얻은 데는 여러가지 설이 있다.
두 차례나 아카데미상을 탄 여배우 베티 데이비스가 트로피를 뒤에서 보았을때 첫 남편 해먼 오스카 넬슨과 꼭 닮아서 '오스카'라고 명명했다는 이야기가 있는가 하면, 헐리웃의 명 컬럼니스트인 시드니 스콜스키가 컬럼을 쓰다가 아카데미상을 늘 '그 상'이라고 표현하는데 싫증을 느껴 '오스카'라고 새로이 고안해 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리고 가장 유력한 설은 아카데미 사서 출신에서 감독으로 변신했던 마거릿 헤릭 여사가 트로피를 보고 “우리 오스카 아저씨를 닮았네요”라고 말한 것을 한 신문의 기자가 듣고 다음날 컬럼에서 아카데미상의 이름을 '오스카'라고 부른다고 쓴 것에서 유래한다는 것이다.
이 3가지 설은 60년 전부터 퍼지기 시작해 현재에 이르고 있는데 어떤 것이 정확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제 '오스카'란 이름은 '아카데미'시상식과 같은 말이 되었버렸다.

아카데미상에 얽힌 뒷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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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카상을 수상하는 건 영화인들에게 있어 영광이 아닐 수 없다.하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시상식 참가를 거부한 사람이 있다.1971년 제43회 때 '패튼장군'으로 남우주연상에 선정된 조지 스콧은 "집에서 하키경기나 보겠다"며 참석을 거부했다.
말론 브란도 역시 1973년 '대부'로 남우주연상의 영예를 안았으나, 미국 인디언에 대한 부당한 처사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수상을 거부하고 시상식에도 불참했다.
1974년엔 로버트 오팔이라는 한 남자가 몸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모습으로 시상식 무대를 가로질러 가는 해프닝이 일어나기도 했으며 1981년엔 당시 레이건 대통령의 저격미수사건으로 시상식이 하루 늦춰지기도 했다.
뭐니뭐니 해도 아카데미 역사에서 가장 이슈가 됐던 건 트로피 도난사건.
지난 2000년 시상식을 불과 1주일여 앞두고 시상자에게 수여할 오스카 트로피가 없어졌다.
주최측은 황급히 트로피를 다시 만드는 소동까지 벌였는데 시상식 직전 LA 한인타운에 위치한 음식점 쓰레기 더미에서 발견됐다

아카데미상에 관련된 기록들

역대 수상자 가운데 실제로 오스카란 이름이 있다. 1941년과 1945년에 걸쳐 두번이나 오스카상을 수상한 뮤지컬 작곡자 오스카 햄머스타인 2세였다. 이밖에 오스카 호몰카(남우조연), 오스카 페르너(남우주연) 등이 있다.
아카데미에서 후보로 선정되기 위해서는 대중성과 함께 예술성, 독창성이 인정돼야 한다. 리메이크작이나 속편들이 거의 수상하지 못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리메이크로 작품상을 수상한 유일한 영화는 1959년도 수상작 '벤허'였다. 이 영화는 1925년에 만들어진 무성영화 '벤허'를 리메이크한 것이다. 이 작품은 지구를 한 바퀴 돌 정도의 필름을 소모했고, 전차 경주장면을 위해 무려 1만5000명이 4개월간이나 동원됐다는 전설 같은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벤허'는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남우주연, 남우조연, 감독, 각색, 촬영, 미술, 음향, 작곡, 편집, 의상, 특수효과 등 12개 부문 후보에 올라 각색상을 제외한 11개 부문을 수상했다.
이는 1998년 제70회 아카데미에서 14개 부문 후보에 올라 11개 부문의 황금상을 석권한 '타이타닉'과 역대 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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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이다.
1편과 속편이 모두 수상한 영화도 있다. '대부'와 '대부2'는 잇따라 작품상을 수상했다.
아카데미에 여러차례 후보에 올랐지만 상복이 없는 스타들도 있다.
1953년부터 1978년까지 모두 7차례 후보에 올랐던 리차드 버튼과 1963년부터 1983년까지 역시 7차례 후보에 올랐던 피터 오툴은 단 한번도 수상의 영광을 누리지 못했다. 폴 뉴먼 역시 7전8기 끝에 '컬러 오브 머니'에서 한번 수상했을 뿐이다.
1940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13개 부문의 후보에 올라 9개의 트로피를 가져갔지만, 정작 주인공인 클라크 케이블은 남우주연상을 '굿바이 미스터 칩스'의 로버트 도네에게 양보해야 했다.
오스카상 최고령 수상자는 1989년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로 여우주연상을 따낸 제시카 탠디로 당시 80세. 최연소 수상자는 1973년 '페이퍼 문'으로 10살때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테이텀 오닐이다.






 

Posted on 2008.04.28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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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8일(월)

▲국내외 주요사건
1686년 = 영국 물리학자 아이작 뉴턴, 만유인력법칙 발표
1770년 = 영국 탐험가 제임스 쿡, 호주에 상륙
1876년 = 영국 빅토리아 여왕, 인도 황제를 겸함
1916년 = 원불교 창시자 소태산 박중빈(朴重彬), 20여년의 구도 생활끝에 깨달음 얻음
1920년 = 영친왕 이은(李垠). 일본 왕족 이방자(李方子) 여사와 결혼
1926년 = 독립운동가 송학선(宋學先),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암살미수
1945년 = 이탈리아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와 그의 애인, 이탈리아 빨치산들에게 처형당함
1952년 = 대일강화조약인 샌프란시스코 조약과 미.일안보조약 발효
1960년 = 4.19 시위로 사임한 이기붕(李起鵬) 부통령 일가, 경무대에서 자살
1967년 = 미국 복서 무하마드 알리, 징집거부로 헤비급 세계챔피언 자격 박탈
1969년 = 현충사 중건. 샤를 드골 프랑스 대통령, 지방제도와 상원 개혁 위한 국민투표 패배하자 사임
1978년 = 주한미군 참모장 존 싱글러브 소장, 카터 대통령의 주한미군 철수계획 반대하다 강제 퇴역
1986년 = 서울대생 김세진.이재호 군, '반전.반핵' 시위 벌이다 분신. 소련, 체르노빌 원자로 폭발 이틀만에 사고 시인
1995년 = 대구지하철 도시가스 폭발사고로 100여명 사망
1997년 = 한보대출 비리의혹과 관련, 청문회 증인으로 출석했던 박석태 전 제일은행 상무 자살
2002년 = 제 4차 남북이산가족 상봉행사 금강산에서 열림
2003년 = 경남 남해군 창선도와 사천시 사이 해협 5개섬을 7개 교량으로 잇는 '연륙연도교' 개통
 


오늘은 대구지하철 가스폭발사고가 난 지 13년이 되는 날입니다.
사람들은 대구지하철 참사와 가스폭발사고를 혼동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대구에서 그것도 지하철에서 대형사고가 두번이나 났으니 혼동할 만도 합니다.

<대구 지하철 도시가스 폭발사고>

-사고일시 : 1995. 04. 28 07:50경
-사고장소 : 대구시 달서구 상인동 영남고교 사거리 지하철공사장.
-피해현황
인명 : 사망 101명, 부상 201명
재산 : 가옥 195채 파손, 차량 152대 파손, 복강판 400m 붕괴
-사고내용
건축공사 현장에서 그라우팅 보일을 위한 천공작업중 도시가스 중압배관을 천공기로 관통시켜 가스가 분출되면서 누출된 가스의 일부가 파손된 우수관을 통하여 지하철 공사장으로 유입되어, 원인미상의 불씨에 의해 폭발이 발생한 사고로서 도로굴착 작업시는 해당관청의 도로굴착 승인을 득한후 유관기관과의 협의를 거쳐 굴착작업을 하여야 함에도 이를 무시하고, 무허가 굴착작업을 한 것이 사고의 원인이 되었음.

 <대구지하철 화재 사건>

2003년 2월 18일 대구광역시 중구 성내동 중앙로역에서 일어난 대형 지하철 화재 사고.
-사고일시 : 2003년 2월 18일
-사고장소 : 대구 중구 성내동 중앙로역
-사고내용 : 정신지체장애 2급 판정을 받은 방화범이 플라스틱통에 들어 있는 휘발유에 라이터로 불을 붙인 뒤 지하철 바닥에 뿌려서 지하철 전동차와 지하철 역사 내부에 화재가 발생함.
사망 192명 / 부상 148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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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지하철 공사장 폭발사고는 1995년4월28일 아침 달서구 상인동 1호선 건설 공사장에서 도시가스 폭발사고가 발생, 출근길 직장인과 등교하던 학생 등 102명이 사망하고 117명이 부상을 입는 등 국내 지하철 사상 손에 꼽히는 대형사고였습니다. 추락한 차량과 피투성이가 돼 숨진 등교길 학생 시민 등 시체로 뒤범벅이 돼있었고 학생들의 책가방이 여기저기 뒹굴어 참혹한 모습이었습니다. 차량 152대가 파손되고 차량통행을 위해 공사장 위에 임시 설치한 복공판 400여m가 무너졌고, 건물 346채가 파손됐습니다. 이로 인한 재산 피해액이 540억 원에 다다란다고 합니다.

 폭음에 놀란 주민들은 아파트를 뛰쳐나와 대피하는 소동을 벌였으며 삽시간에 일대 도로는 마비돼 아수라장을 이뤘다.살려달라고 아우성치는 부상자들의 절규가 대구의 하늘을 울게 했습니다..

 사고의 원인은 지하철 공사장에서 30m 떨어진 대백 프라자 신축공사장에서 작업을 위해 75㎜ 구멍 31개를 굴착 중 실수로 도시가스 배관에 구멍이 뚫려 가스가 누출, 지하철 공사장으로 유입돼 폭발한 것. 이 사고로 사전에 지하굴착 공사장의 안전관리와 도시가스에 대한 안전의식을 인식시켜 주는 계기가 되어 대책기구의 설립과 도시가스사업법 등 관계 법령의 개정을 가져왔습니다.

사람의 조그마한 실수가 엄청난 결과를 가져온 사건 입니다.
그 후 정부나 지방자치단체는 안전불감증에 대해 추후에는 이런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철저히 감독하겠다고 말했지만 인재로 인한 사고는 끊이지 않았습니다.

삼풍백화점 붕괴사건
- 일시 : 1995년 6월 29일
- 인명피해 : 사망 502명, 부상자 1000여명
- 사고원인 : 설계, 시공, 감리 및 유지관리 단계
부실복합 요인

인천 호프집 화재사고
- 일시 : 1999년 10월 30일 PM 07:00 경
- 인명피해 : 사망 57명, 부상자 80명
- 사고원인 : 조형물 설치등 보수작업 중이던 지하 노래방의 종업원의 부주의로 보여짐


그리고 2003년 대구지하철화재 사건까지..최근에는 인명피해는 없었지만 숭례문 전소사건이 있었지요.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었지만 우리의 소중한 자존심을 상실한 그런 사건이었지요. 언제까지 안전불감증 탓만하고 있어야 할까요? 시민의 안전과 우리의 자존심을 지켜줄 정부나 지방자치단체, 공무원들은 언제쯤 볼 수 있을까요?
아무리 일부 정신나간 사람이 소행이나 일부사람의 부주의에 의한 것이라도 그 결과는 너무나 참담합니다.
그래서 정부나 지방자치단체에게 이를 방지할 대책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건설이 중요한게 아니고 성장이 중요한게 아니고 사람이 사람답게 안전하게 살수 있는 사회.. 그런 사회를 먼저 만들어야 하는게 아닐까요? 선진국의 척도는 국민소득이나 경제규모 이런것 만으로 결정되지는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내나라 내동네에서 마음놓고 생활할 수 없다면 어떻게 선진국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13년전에 불의의 사고로 유명달리하신 피해자분들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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