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커우공원'에 해당되는 글 1건

Posted on 2008.04.29 13:49
Filed Under 역사 이야기

 4월29일(화)
▲국내외 주요사건
1911년 = 국내거주 양의(洋醫), 총독부의원에서 조선의학회 조직
1932년 = 윤봉길의사, 상하이 훙커우(虹口) 공원에서 폭탄투척 일본군 장성 7명 사상
1948년 = 북한 인민회의, 헌법초안 만장일치 채택
1956년 = 프랑스군, 인도차이나서 완전철수
1961년 = 충주비료공장 준공
1970년 = 닉슨 미국 대통령, 캄보디아 군사개입 선언
1975년 = 주월남 한국대사관, 사이공서 철수
1978년 = 고리원자력발전 1호기 상업 발전 시작
1980년 = 부산 동국제강 종업원 1천여명, 임금·상여금 인상 요구하며 농성
1981년 = 언론중재위원회 발족
1986년 = 증권감독원, 59개사를 기업공개 대상법인으로 선정 발표
1987년 = 시화지구 간척사업 착공
1991년 = 남북 단일 여자 탁구팀, 일본 지바에서 열린 제 41회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우승
1992년 =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흑인폭동 발발 58명 사망 2천300여명 부상
1996년 = 해운항만청, 독도 접안시설 건설공사 본격 착수
1998년 = 삼성전자, 세계 최초로 256메가 D램 메모리 반도체 생산
2003년 = 대통령 자문기구인 제2건국범국민추진위원회, 4년 6개월만에 해체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오늘은 윤봉길의사가 1932년 일왕의 생일날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폭탄을 던져 대한민국 남아의 기개를 전세계에 알린지 76주년이 되는 날이다. 이 의거로 시라카와 일본군 대장과 일본인 거류민단장 가와바다[河端貞次]는 즉사하였고,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野村吉三郞] 중장과 제9사단장 우에다[植田謙吉] 중장, 주중공사 시케미쓰[重光癸] 등이 중상을 입었으며 식장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중국의 지도자 장제스(蔣介石)은 이 거사를 두고 "4억 중국인이 해내지 못하는 위대한 일을 한국인 한 사람이 해냈다.”고 격찬하였다

윤봉길의사는 누구인가?

윤봉길의사는 6월 21일 (음력 5월 23일) 오후 8시 경, 충남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의 일명'목발이'라고도 하는 마을 178번지에서 5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윤봉길의사의 주요연보는 아래와 같다.

 1908.06.21 충남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178번지 광현당에서 출생
 1911        (4세) 광현당에서 저한당으로 옮겨와 23세까지 생활
 1914        (7세) 천자문을 외우고 동몽선습 학습            
 1918       (11세) 덕산공립 보통학교입학            
 1919       (12세) 3.1 독립운동에 자극받아 식민지 교육을  배격하고 보통학교 자퇴
               최병대(崔秉大) 문하에서 한학을 수업              
 1921       (14세) 서당 오치서숙(烏峙書塾)에서 유학자 매곡  성주록 선생의 문하생        
 1922       (15세) 성주 배(裵)씨 용순(用順) 여사와 결혼              
 1923       (16세) 오치서숙 춘추 시회에서 장원              
 1925       (18세) 시집 「오추(嗚推)」,「옥수(玉睡)」, 임추(壬椎)」등 발간              
 1926       (19세) 오치서숙 한학수업 마침, 「매헌(梅軒)」   아호를 얻음,
             농촌계몽 농촌부흥운동 독서회운동 시작              
 1927       (20세) 「농민독본」(3권) 저술              
 1928       (21세) 부흥원 설립기념 우화 「토끼와 여우」 공연, 월례강연회 개최
             기사년(己巳年) 일기(日記)」를 쓰심,
             위친계(爲親契) 조직, - 월진회(月進會) 및 수암 체육회 조직                
 1930      3.6(23세)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유서 작성후 조국독립을 위해 중국으로  망명            
 1931      (24세) 10월 : 만주 독립군기지를 돌아보고, 중국 청도에 도착  (처음 어머님께 편지를 송부)
                    5월 8일 : 중국 청도에서 배편으로 상해로 옮김
                      :  한인공우회 조직하고, 노동야학 및 노동운동
              (24세) 김구, 이유필, 최동오, 김현구, 김의한, 김두봉, 박창세, 안공근등과 독립 운동
               
1932     4.26(25세): 대한민국 14년에 상해 거류민단 사무실에서
                   : 한인애국단 선서식」을 거행하고 백범 김구선생과 기념촬영
          04. 29 : 11시40분(한국시간 12시40분) 상해 홍구공원의거,
            : 일본의 천장절과 전승기념 축하식 단상에 수통형 폭탄 투척하여 시라카와 대장
              이하 중국 침략의  군관민 수괴들을 응징

           5. 25 : 상해파견 일본 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
          11.18 : 일제 대양환으로 일본 오사카로 호송되어 20일 오사카 육군 형무소에 수감
          12.18 : 가나자와 육군구금소로 이감
          12.19 : 아침 7시40분(25세): 가나자와 교외 미고우시 육군 공병작업장에서 총살형으로 순국

25세의 젊은 나이에 대한민국 독립운동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기시고 윤봉길의사는 일제의 총살형으로 순국하셨
진위여부가 논란이 되고 있는 윤의사 사진

진위여부가 논란이 되고 있는 윤의사 사진

다. 요즘같으면 군대를 다녀와 대학을 다니거나 사회 초년생으로 또는 이제 막 사회에 발을 디딜 준비를 할 나이에 윤의사는 나라와 민족을 생각한 뜻있는 거사를 진행하신 것이다. 물론 시대상황이 다르니 단순비교를 하기에는 무리가 있으나 만일 요즘세상 그 때와 똑같은 상황이라면 윤의사와 같은 진정한 용기를 보여줄 젊은이들이 얼마나 될까? 생각해 보면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농촌계몽운동가 - 윤봉길

일부 몰지각한 친일파들은 윤의사를 테러리스트나 살인범으로 매도하기도 한다.하지만 나라를 빼앗긴 상황에서 윤의사가 취한 행동은 독립전쟁의 한 방식 이었으며 정당한 독립운동인 것이지 테러나 암살이 아닌 것이다.
흔히 사람들은 윤봉길의사를 애기할 때 폭탄의거만 애기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윤봉길 의사는 폭탄의거 전에도 나라와 민족을 위해 헌신적인 봉사를 아끼지 않았다.
농촌의 발전을 위해 ‘부흥원(復興院)'이란 단체를 설립하여(1929), 농촌 부흥운동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였으며. 부흥원 주관으로 학예회를 열고, 촌극인 ‘토끼와 여우’를 공연하였는데, 농촌에서 문화활동이 많지 않던 당시여서 관람객이 매우 많이 모여 성공리에 마쳤다. 이것이 원인이 되어 일본 경찰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 후에도 농촌활동을 계속하였고, ‘월진회(月進會)'라는 농민단체를 만들어 회장에 추대되었고, 이를 기반으로 농촌자활운동을 펴나갔다. 또한 건강한 신체 위에서 농촌의 발전과 민족독립정신이 길러질 수 있다는 신념으로 ‘수암체육회(修巖體育會)'를 조직하여 농민들의 건강증진활동도 이끌어 나갔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서울 서초구 양재동 시민의 숲 내에는 1988년에 세워진 윤봉길의사기념관이 있다.
1,2층으로 이루어진 이 기념관에는 윤봉길 의사와 관련된 많은 유물이 전시되어 있으며 윤의사 동상과 기념비도 자리하고 있다. 따스한 봄날 나들이가 많은 요즘 아이들 손을 잡고 우리 민족의 혼을 다시 일깨워준 윤봉길 의사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는 것도 좋은 일이 아닌가 싶다.
윤의사의 기념관은 중국 상해에도 있다.

About

by 붉은방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