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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on 2008.07.25 14:19
Filed Under 역사 이야기

"청백리의 표상 ."
"세종같은 임금에 황희같은 정승."

조선 세종때에 18년 동안 영의정의 자리에 있으면서 세종대왕의 찬란한 태평성대를 이끌었던 황희에 대한 대표적 표현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머리속에서 황희는 관직자의 표본,청렴결백한 관리,뛰어난 정치가로 각인되어져 있다. 요즘 KBS 의 [대왕세종] 에서 개성있는 배우 김갑수씨가 황희역으로 열연을 하고 있다.
황희는 워낙 생활이 근검해서 정승의 위치에 있었지만 초가집에서 살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물론 과장이 있겠지만 그만큼 사람들은 황희의 청렴함을 늘 높이 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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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왕세종 황희역 배우 김갑수씨>


그런데 이런 황희정승에 대해 세종실록에 갖가지 비리 스캔들이 무수히 열거되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조선시대 관리의 감찰을 맡았던 사간원과 사헌부에서 황희의 비리에 대한 고발과 탄핵이 수차례 였으며
세종대왕도 이를 무시하지 못해 황희를 수차례 좌천시킨다. 물론 바로 복직 시키고 더 높은 관직에 기용하기는 했지만...

우리가 아는 황희정승과 당시 사관들이 기록한 황희정승의 모습은 어떻게 다를까?

새로운 왕조의 신하

황희는 고려말 개성에서 태어났다.
열네살 되던해 음서로 복안궁녹사가 되었다가 스물한살 때 과거에 합격하여 성균관 학관이 되었다.
고려가 망하고 이성계가가 조선을 건국하자 다른 고려 유신들과 같이 두문동으로 들어갔으나 이성계의 간곡한
청으로 두문동을 나와 벼슬길에 올라 두문동 사건 을 피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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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의 두문동비>


음서 [蔭敍]  : 고려·조선 시대 부(父)나 조부(祖父)가 관직생활을 했거나 국가에 공훈을 세웠을 경우에 그 자손을 과거에 의하지 않고 특별히 서용하는 제도.

<두문동사건>
이성계(李成桂)의 조선건국(朝鮮建國)에 반대한 고려의 유신 신규(申珪) 등 72인은 개성 남동쪽에 있는 이른바 ‘부조현(不朝峴)’에 조복(朝服)을 벗어 던지고, 두문동에 들어가 끝까지 신왕조(新王朝)에 출사(出仕)하지 않았다. 이에 이성계는 두문동을 포위하고 72명의 고려 충신들을 몰살하였는데, 후일 정조(正祖)때, 표절사(表節祠)를 그 자리에 세워 그들의 충절(忠節)을 기렸다.                                  
  - 네이버 백과사전 -



그 후 정종과 태종을 거쳐 세종대에 이르러 좌참찬에 올랐고 예조판서,이조판서,우의정을 거쳐 마침내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는 영의정에 올랐다.1449년 벼슬에서 물러날 때 까지 18년간 영의정에 재임하면서 세종을 도와 농사의 개량 , 예법의 개정, 천첩(賤妾) 소생의 천역(賤役) 면제 등 업적을 남겼다.
황희와 세종은 그 시작이 그리 좋지는 않았다.
1418년 태종이 세자인 양녕대군을 폐하고 충녕대군을 세자로 책봉되자 이를 반대하여 서인으로 좌천되고 교하(交河)로 유배, 다시 남원에 이배되었다.
하지만 세종은 임금에 오른 뒤 당시 조정신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를 관직에 다시 기용했으며 이후 몇 몇번의 좌천과 유배를 당하지만 87세에 벼슬에서 물러나기 까지 세종의 곁에서 세종의 정치를 도왔다.

청백리를 상징하는 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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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희 정승의 영정>

황희정승의 청백리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일화가 바우쇠일화와 겨울관복 일화이다.
하루는 세종이 궁중에서 연회를 베풀었는데 영남 우미골의 광대 바우쇠가 공중 줄타기 묘기를 보이며 허리에 맨 비단천을 양쪽 엉덩이에 번갈아 가져다 대며 "이게 바로 황희정승댁 속곳춤이라 ..."라고 말을 해 좌중을 웃겼다.
연회가 끝나고 세종이 이를 궁금히 여겨 불러다 물어보니 대답왈
"황희정승댁은 가난하여 속곳하나를 가지고 하루는 마님이 있고 하루는 아가씨가 입고 외출을 한다더라."라고 말했다.
황희정승의 겨울관복 일화도 유명하다.
황희정승은 겨울관복이 한벌 밖에 없었는데 겨울 어느날 정무를 일찍 마쳐 집에 오는 길로 그 관복을 뜯어 빨래를 했다.화롯가에 말리면 다음날 입궁할 때 까지는 입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밤중에 궁궐로 부터 즉시 입궁하라는 어명이 내려졌다. 이에 어쩔수 없이  풀어놓았던 솜들을 몸에 두르고 그 위에 관복 겉저고릴 덧입고 왕앞에 나가게 되었다. 세종과 침입한 왜구에 대해 논의를 하던중 세종은 관복사이에 삐져나온 솜뭉치를 보고 이를 의아하게 생각해 물으니 황희정승이 자초지정을 애기하게 되었고 이에 감복한 세종은 황희에게 비단 열필을 하사하려고 하였으나 굶주리고 있는 백성을 생각한 황희의 사양에 비단하사를 포기했다는 일화이다.
두 이야기 다 당시 최고의 위치에 있던 영의정 황희가 얼마나 검소하게 살았는지를 나타내 주는 일화이다.

실록속의 황희

조선왕조는 기록의 왕조이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도 등재되어 있는 조선왕조실록은 당대의 왕까지도 그 기록의 열람이 제한되었던 엄격한 기록이다.
여기에 황희에 대한 비리스캔들이야기가 나온다.

"관가의 둔전을 의정 황희의 어머니 김씨에게 주었으니 이는 반드시 내막이 있다."
                                                                     - 세종실록 13년 사헌부 보고문 중 -
"황희가 교하 수령 박도에게 토지를 요구하고 아들을 행수로 들이 붙였으며 또한 태석균의 고신(고문)을 청탁으로 막아 주었으니 이는 진실로 의롭지 못하다"
                                                                     - 세종실록 13년 9월8일 세종의 어록 -



태석균 사건은 황희가 투옥된 태석균의 감형을 사사로이 사헌부에 부탁한 일로 황희는 이일로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었다.
이 사건 뿐만 아니라 황희는 첨절제사 박유에게 뇌물을 받았다가 구설에 오르기도 했으며 박용이라는 역리에게 말 여러필을 선물 받고 청탁성 편지를 썼다가 의금부에 하옥되기도 한다.
황희의 사위가 저지른 살인 사건에 대해서도 당시 좌의정이었던 맹사성과 형조판서 서선이 공모하여 범죄를 축소하고 무마하려다가 발각되어 관직에서 물러나기도 하였다.이 이외에도 여러차례 비리연루로 사헌부와 사간원 탄핵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영의정 월급은 얼마 ?

조선시대 최고의 관직인 영의정의 연봉은 쌀과 잡곡을 합해 쌀 90석 명주 5필 삼베 15필이었다.
그러나 이마저도 다 받지 못하는 때가 허다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관리들은 생계를 위해 비리를 저지르기도 하고
고위직으로 갈수록 챙겨야 할 식구들이 많아져 정치자금을 받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렇듯 뇌물을 받는 관리들이 만연하지 조정에서는 이를 방지하기 위한 정책으로 청백리포상이었던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뇌물을 받는 관리들이 너무 많아서 청백리상을 만든 것이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황희 , 맹사성 , 조광조  등등이 이 청백리 포상을 받았다. 따지고 보면 우리가 알고 있는 왠만한 위인이면 누구나 이 청백리 포상을 받았다. 그래서 가문의 족보나 연혁에 나오는 청백리포상은 그리 크게자랑할 만한 일이 아닐 수도 있다.

공적이 비리를 덮는다.

황희에게 이러한 많은 흠이 있었음에도 세종의 곁에서 18년간 영의정을 지내며 권력의 핵심에 있을 수 있었을까?
1392년 객구한 조선은 아직 그 기틀을 다 확립하지 못한 상태 였고 또한 두번의 형제들의 싸움으로 만들어진 왕권이 이제 세종에게 넘어가는 시점에 세종은 도덕적으로 청렴한 신하보다 정치력이 뛰어나고 자신의 이념을 실현해 줄 수있는 신하가 필요했을 것이다.
실제로 황희는 세종과 함께 정무를 보던 시절 세종의 의중을 가장 잘 이해하고 이를 정무에 반영했으며 세종이 하고자하는 정책을 집행함에 있어 주저함이 없었다. 또한 영의정 황희 - 좌의정 맹사성의 조합은 세종의 정책을 가장 잘 실현시킬 수 있는 최강의 원-투 펀치였던 것이다.
이러한 이유가 황희의 수차례 비리연루에도 불구하고 세종이 그를 가까이 두고 정책을 논의한 배경이다.
수차례의 파직과 복권을 거쳐 마침내 영의정에 오른 황희는 자신을 믿고 끝까지 신뢰를 보내준 세종의 대업을 이루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게 된다.

황희에 대한 악평과 비리연루 의혹을 기록했던 사관들도 훗날에 이르러 서는 다음과 같은 평을 남긴다.
"성품이 지나치게 관대해 단점이 있으나 일처리함에 있어 생각이 깊고 식견과 도량이 넓어 재상으로서의
풍부한 자질을 지니고 있었다. 집을 다스리는 데에는 검소하고 기쁨과 노여움을 안색에 나타내지 않고
번거롭게 변경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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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파주시 문산읍 사목리. 경기문화재자료 제12호. 황희(黃喜:1363∼1452)가 1449년(세종 31) 87세의 나이로 18년간 재임하던 영의정을 사임하고 관직에서 물러난 후 갈매기를 벗삼아 여생을 보낸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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